통신사 행렬 건너던 다리 매몰 반세기 만에 실체 찾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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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호 01면

낙동강변 조그만 마을 경남 삼랑진에는 ‘처자다리·중다리’의 전설이 전해진다. 마을 근처 작은 절에 중이 살았는데 동네의 아리따운 처자(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두 남녀는 사랑의 표시로 마을 개천에 다리를 하나씩 놓는 시합을 벌였다. 처자가 먼저 다리를 완성하자 중은 게으름을 피웠던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서둘러 다리를 짓고 마을을 떠났다는 것이다. 승려가 토목 기술자로 참여한 사실이 세월이 흐르며 전설로 바뀐 것이겠지만 삼랑진 사람들은 본래 이름이 무엇이었든 강가의 돌다리를 ‘처자다리’로 불러왔다.

지난해 봄 4대 강 사업 낙동강 12공구인 삼랑진 강변에서 공사가 시작됐다. 삼랑진청년회 이종규(40) 부회장은 마음이 바빠졌다. 향토문화재에 관심이 남다른 이씨는 땅속으로 사라진 처자다리를 되살릴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처자다리를 본 적도 없다. 하지만 강가의 거대한 돌다리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다. 동네 어른들은 50년 전까지만 해도 다리를 볼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큰 홍수로 강이 몇 번 범람하자 다리는 진흙에 묻혀 사라졌다. 어렴풋이 위치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씨는 수소문 끝에 그 다리가 딸기 재배 비닐하우스 아래에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시공사와 읍사무소, 밀양시청 등에 다리 이야기를 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국토해양부와 문화재청에 민원을 제기했고, 발굴이 결정됐다. 문화재 발굴기관인 (재)우리문화재연구원이 3월 중순 발굴조사에 착수해 한 달여 만에 웅장했던 다리의 원래 모습이 드러났다(사진). 낙동강으로 흐르는 지천 위에 세운 쌍홍예의 석조 교량이다. 폭 4.5m에 현재 발굴된 길이는 26m다.

이 다리가 놓인 길이 영남대로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에 동래와 한양을 직선으로 잇는 약 380㎞의 간선도로였다. 조선의 도로는 한양을 중심으로 X자 형태로 뻗어있다. 함경도로 향하는 북로와 충청·전라도를 통과하는 삼남대로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향하는 길이어서 실질적 쓰임새보다 상징성이 컸다. 반면에 중국으로 향하는 서로(西路)는 외교의 길이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영남대로는 문화경제적으로 중요한 길이었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유생의 본고장인 영남내륙을 통과했고 남도의 물산이 이 길을 따라 한양으로 들어갔다. 일본으로 가는 길이기도 했다.

영남대로의 흔적은 지금도 군데군데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문경새재다. 고개 아래서 3관문까지 6㎞의 길은 최근 걷기 명소로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옛길은 신작로에 편입되고 철길로 바뀌고, 농경지로 변했다.

최영준(69·전 문화재위원) 고려대 명예교수는 “영남대로는 왕의 길”이라고 말했다. 왕의 통치 명령이 지방으로 하달되고 행정문서가 오갔으며 각종 민원이 도성으로 향하는 행정통신로였다는 설명이다. 지난 1일 발굴 현장을 방문하고 온 최 교수는 ‘반갑고 놀랍다’고 했다. “지방에서 이런 수준의 다리가 나온 건 처음 있는 일입니다. 경기도 안양에 돌로 만든 만안교가 있지만 그것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러 가기 위해 만든 다리였죠.”

최 교수는 다리의 건축 시기를 17세기 말, 구체적으로는 숙종 연간이라고 추정했다. 임진왜란 뒤 국가 기간시설이 많이 건축되던 때다. 일본으로 통신사를 보내기 시작하면서 건축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당시 지방의 다리는 징검다리나 기껏해야 목조다리였는데 이런 규모의 석조다리를 건축한 것은 통신사 아니면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통신사 일행은 300명 정도였다. 그들이 하천을 건널 때마다 바지를 걷을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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