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그라운드제로 ‘침묵의 추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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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9·11 테러 현장인 뉴욕 맨해튼 ‘그라운드제로’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테러 희생자들에게 헌화한 뒤 묵념하고 있다. 2009년 1월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은 묵념 외에 공식 연설을 하지 않았다. [뉴욕 신화통신=연합뉴스]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미국 대통령이 5일(현지시간) 9·11 테러 현장인 뉴욕 맨해튼의 ‘그라운드제로’를 방문했다. 9·11 테러를 명령한 알카에다 지도자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이 사살된 지 사흘 만이다. 그의 그라운드제로 방문은 취임 후 처음이다. 오바마는 붉은색·흰색·파랑색 꽃으로 만든 꽃다발을 헌화한 뒤 두 손을 모았다. 그는 참석자와 함께 잠시 묵념했을 뿐 연설은 하지 않았다.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9월 14일,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왼쪽)이 무너진 세계무역센터 현장에서 확성기를 잡고 구조대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로이터]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침묵의 추모’에 대해 “테러 희생자를 추모하고 경찰관과 소방대원을 기리며 참담한 공격을 당한 상황에서도 하나가 됐던 미국의 하나됨을 기억하는 자리에서 어떤 말도 필요치 않다”고 설명했다. 침묵은 때로 어떠한 웅변보다 더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의미로 읽힌다. 뉴욕 타임스(NYT)는 “오바마가 그라운드제로 방문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모양새를 피하기 위해 연설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풀이했다. 이날 행사엔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도 초대받았으나 “전직 대통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자리에 나서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사양했다.

 오바마는 그라운드제로 방문에 앞서 9·11 때 15명의 희생자를 낸 소방서도 방문했다. 그는 “우리가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그 말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뜻이었다”고 말했다. 9·11 직후 부시 대통령은 그라운드제로 현장을 방문해 확성기를 손에 들고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사람은 반드시 응징을 당할 것”이라며 “우리는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오바마의 이날 그라운드제로 방문은 10년 동안 추적해온 빈 라덴을 제거한 뒤 미국 대통령으로서 약속을 지켰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라고 미 언론들이 전했다. 그러나 오바마는 이날 빈 라덴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현장 분위기도 과거 추모 때와는 사뭇 달랐다. 매년 9·11 추모 때는 웃음을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이와 달리 이날 오바마는 희생자 가족과 대화를 나누며 미소를 띠기도 했다. 특히 9·11 때 아버지를 잃은 14세 소녀 페이튼 홀이 미국의 아이돌 가수 저스틴 비버를 만나고 싶다고 말하자 오바마는 즉석에서 “다음에 올 때는 그를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그라운드제로 밖에선 오바마를 환영하기 위해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 북새통을 이뤘다. 그러나 테러 가능성을 우려해 오바마는 군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날 행사엔 9·11 당시 뉴욕시장이었던 루돌프 줄리아니와 마이클 블룸버그 현 시장,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 찰스 슈머 상원의원 등이 참석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그라운드제로=본래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을 뜻하는 군사용어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핵무기 공격을 받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가리켰다. 2001년 9월 11일 이후엔 알카에다가 납치한 두 대의 비행기가 충돌한 뒤 붕괴한 세계무역센터 건물터를 이르는 말이 됐다. 지난해엔 그라운드제로 인근에 모스크(이슬람사원)를 건립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돼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현재 이 자리에는 높이 541m의 초고층 빌딩인 프리덤타워 건립 공사가 진행 중으로 골조 공사가 절반가량 이루어진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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