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긴급대담] 벤처신드롬 '거품이다 VS 거품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코스닥 시장 거품론' 을 제기한 전국경제인연합회 유한수 전무와 벤처업계 대부격인 한글과컴퓨터사 전하진 사장은 지난 19일 오후 중앙일보 회의실에서 2시간30여분간 격론을 벌였다.

두 사람은 연초부터 산업계의 최대 관심사로 떠오른 인너넷.벤처 신드롬을 놓고 기존산업(제조업 중심 대기업)과 인터넷 비즈니스(정보통신.인터넷.벤처 등)의 관점에서 열띤 공방전을 가졌다.

▶전하진 사장〓19일 코스닥 지수가 200 아래로 떨어진 것은 전경련의 '거품론' 주장 영향이 매우 크다.

▶유한수 전무〓인터넷 비즈니스가 올바른 방향으로 간다고 해도 과열현상 등 거품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코스닥 시장의 경우 지난해 말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98년 대비 무려 80배나 급성장했다.
아무리 미래가치가 높은 벤처기업이라고 해도 너무 심하다.

정부가 벤처.지식산업을 육성하는 정책은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존 직장에서 나온 고급인력이 벤처 창업으로 몰려 경제회생의 견인차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시중의 유동성이 동시에 풍부해져 개인들이 새로운 투자수단으로서 고수익.고위험 시장인 코스닥에 눈길을 돌린 것이다.
따라서 벤처기업들이 코스닥 시장에서 실제 내재가치 이상으로 주가가 높게 평가됐다.
요즘 코스닥 시장이 다소 조정받고 있지만 과학적인 투자가 아닌 이른바 '묻지마 투자' 바람이 분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았다.

▶전〓지적한 대로 일부 문제가 있다.
최근 코스닥 주식이 급락하자 우리 회사로 전화를 걸어 항의하는 투자자가 많다.
이 가운데 일부는 "한글과컴퓨터사가 컴퓨터를 만드는 회사냐" 고 문의할 정도다.
주주가 회사의 내용도 모르고 투자하는 식이다.

▶유〓바로 그런 사회 분위기를 전경련에서 지적한 것이다.
웬만큼 알려진 회사가 그 정도인데 다른 기업들은 오죽하겠는가.
이렇다 보니 국내 산업의 '벤처 신드롬' 이라는 얘기도 나오는 것이다.
코스닥에서 옥석(玉石) 구분 없이 '동반상승 동반하락' 현상이 반복되고 있지 않은가.

▶전〓완만하게 벌어진 J자(字)형태의 곡선으로 성장하는 게 인터넷 비즈니스의 특징인데 국내에서는 아직도 글자 밑 꼭지 좌표에 서 있다.
따라서 벤처산업 등이 급성장의 길로 접어드는 '출발 단계' 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이들 기업이 앞으로 혁명적인 퍼포먼스(결과)를 낳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유〓이들 기업의 미래 기대치가 제조업에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천문학적인 규모' 라서 문제다.
매출액이 2백억원도 채 안되는 코스닥 기업이 10대 그룹의 모(母)기업보다 주식 시가총액을 능가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나.

▶전〓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MS)사는 이미 4~5년 전에 공룡 같던 대기업들을 앞질러 시가총액 1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현재까지 'MS가 미국 기업의 최정상을 지키는 것을 놓고 '거품' 이라며 꼬투리를 다는 사람은 없다.

우마차(牛馬車) 1백대를 가진 화물운송 업자와 최신 트럭 5대를 운영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을 비교할 줄 알아야 한다.
산업의 패러다임이 급속히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아날로그 장비를 잔뜩 가진 기업을 자산으로 평가하는 구시대적인 사고는 이제 떨쳐내야 한다.
대기업의 시각으로 보면 우마차가 엄청난 자산일지 모르지만 벤처기업 시각으로 보면 쓸만한 장비로조차 인정할 수 없다.
디지털 산업시대에서는 자산가치의 계산법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유〓미국의 나스닥과 같은 세계적인 시장에서 급부상하는 벤처기업이라면 천문학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시장에서는 아직 그렇지 못하다.
시장제도에 의해 기업이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채 이런저런 인터넷 비즈니스라는 이름으로 주식시장을 활보하는 일이 허다하다.
개인들은 회사의 '벤처' 라는 이름만 보고 투자하고, 주가는 영문도 모른 채 천정부지로 뛰고 있는 것이다.

▶전〓기존 대기업들이 코스닥으로 돈이 몰리니까 산업자금 편중이라며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닌가.

▶유〓국내 자금시장을 보면 코스닥 시장에는 개인이 주로 투자하고 거래소 시장에는 기관투자가가 몰려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이밖에도 대기업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하다.
주식시장뿐만 아니라 채권이나 어음 등을 발행해 조달할 수 있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이 한정된 자원을 놓고 다툼을 벌인다는 것은 너무 비약이다.

▶전〓그러나 시중에서는 그같이 인식하고 있다.

▶유〓그보다는 대기업에 있던 자금과 인력이 벤처로 일시에 옮겨져 '큰기술' 을 홀대하는 풍조가 만연한 것이 문제다.
벤처 붐으로 자원이 쏠려 '잔기술' 만 범람하지 않을까 걱정된다는 얘기다.
대기업에서 장기적인 큰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할 우수한 연구개발 인력이 모두 자기 벤처사업을 하겠다고 줄줄이 회사를 그만두는 실정이다.
고급인력을 월급만으로 붙잡아 두려는 기존 기업들도 문제지만, 전체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렇다는 얘기다.
벤처부분이 이른바 '과속' 하는 데서 오는 부작용이다.

▶전〓현재 국내산업이 급속히 재편되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제조업체들이 너무 빠르다는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기업들이 3개월을 1년으로 인식하고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로 변했다.
국내 산업구조와 대기업의 체질이 빨리 바뀌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미국.일본 등의 산업발전 단계를 볼 때 탄탄한 제조업과 기술을 바탕으로 인터넷 비즈니스 산업구조가 발전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미국은 레이건 대통령 때 '스타워스 프로젝트' 등 군사적 목적에서 개발된 풍부한 첨단기술이 오늘날의 인터넷 산업의 자산이 됐다.
또 벤처기업의 산실인 실리콘 밸리 등과 나스닥의 풍부한 자금원이 되는 사회적 인프라가 먼저 탄탄히 구축된 뒤 인터넷 비즈니스가 성장했다.

▶전〓수긍은 하지만 전통적인 기업형태의 산업구조가 중요하다고 빠른 변화의 수용을 거부하면 안된다.
예를 들어 대기업의 오너를 중심으로 한 '황제경영' 은 지금보다 더 빨리 무너질 수밖에 없다.
대기업의 황제경영이란 모든 정보가 위로 몰리고 최고 경영자 한사람이 이를 근거로 독단적인 결정을 내리는 형태다.

그러나 지금은 인터넷.정보화가 된 기업환경으로 변했다.
이제는 신입사원이 상사나 최고 경영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뛰는 시대다.
드넓은 인터넷 바다에서 직급.연령과 상관 없이 누구나 파이프를 꼽아 정보를 뽑아 쓸 수 있는 경영환경인 셈이다.
따라서 기업의 오너나 최고 경영자도 직원들을 주종관계가 아닌 경영 파트너로 인정해야 한다.
결국 기존 기업들도 벤처와 마찬가지로 스톡옵션(주식매입선택권).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는 인재를 붙잡아 둘 수가 없다.

또 기업들은 디지털 인프라를 이용하는 업체로 변해야 한다.
인터넷 비즈니스를 하느냐 안하느냐에 따라 생존 문제가 걸려 있다.
전통적인 업체 모두가 '정보기업' 으로 업종을 변신하는 게 아니라 '정보화 기업' 으로 탈바꿈해야 된다.

▶유〓기업의 생존을 위해서는 시대변화에 맞춰 기업문화도 발빠르게 움직여야 하지만 과속해서는 부작용이 뒤따른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전〓국내 대기업의 급변하는 산업현장에서의 역할도 매우 중요하다.
벤처기업을 자신이 직접 하겠다고 덤벼드는 한국적인 현실 때문이다.
대기업은 장기 프로젝트와 대형투자로 큰기술을 개발하고 벤처기업들이 잔기술을 개발하는 역할 분담이 이뤄져야 한다.

▶유〓그런 측면이라면 최근 삼성이 새롬기술과 전략적 제휴를 맺은 것은 바람직하다.
대기업이 벤처기술을 인정한 사례로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전〓과거 벤처기업이 1백억원을 투자해서 기술을 개발하면 대기업은 5백억원을 투입해 이를 방해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대기업은 벤처업계의 성장에 군침 흘리고 훼방을 놓을 것이 아니라 이들로부터 후하게 돈을 주고 기술을 사주면 자연스럽게 상호 보완체제가 형성된다.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경쟁상대로 보고 과민반응하는 것은 현실 인식을 잘못한 것이다.

▶유〓대기업이 벤처를 시기.질투하는 게 아니다.
대기업들도 최근 내부 유보가 늘어났지만, 풍부한 자금을 과거와 같이 문어발식 확장에 투입하지는 않는다.
기왕이면 벤처 투자펀드를 만들어 나가려는 움직임이 있다.

▶전〓대기업이 유행처럼 벤처에 투자하면 시장의 거품을 더 조장하는 현상을 빚을 수 있다.
벤처 투자는 엔젤이나 캐피털 업계가 맡아야 더 효율적이다.

▶유〓그렇지 않다.
대기업은 벤처에 투자할 때 냉정한 시장판단에 근거한다.
개인 투자자의 묻지마 투자와는 성격이 다르다.
전사장 말대로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나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인수.합병(M&A)할 때는 '작은 것을 수탈하는 짓' 으로 일반인들에게 인식되는 것이 문제다.

▶전〓그 점은 대기업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대기업이 벤처업체를 활발히 M&A 해줘야 시장이 활성화된다.
미국의 벤처사업가들은 1~2년 안에 대기업한테 돈을 받고 기술 등을 파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런 좋은 의미의 '먹이사슬 시장' 이 형성되지 않아 어렵다.
대기업이 비싸게 벤처기술을 사줘 봐라. 벤처업체들은 대기업이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24시간을 투입할 것이다.

지금은 벤처사업가가 창업자이자 기술자.전문경영인을 함께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기업과 역할 분담이 제대로 이뤄진 산업구조라면 양측이 모두 성장할 수 있다.
국내에선 벤처기술을 인정하지 않아 미국 등 해외기업에 팔리면 나중에는 국가 경쟁력이 떨어지는 원인이 될 것이다.

정리〓김시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