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국사 신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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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서기 720년 편찬된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세 권의 백제 역사서를 인용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그만큼 백제의 영향력이 강했다는 뜻이다. 백제 삼서(三書)라 불리는 『백제신찬(百濟新撰)』 『백제본기(百濟本紀)』 『백제기(百濟紀)』가 그것이다. 이 책들이 전한다면 우리는 백제에 대해 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은 언제 국사를 편찬했을까?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기(古記)』를 인용해 백제는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 박사 고흥(高興)이 역사서 『서기(書記)』를 썼다고 전한다. 신라는 진흥왕 6년(545) 대아찬 거칠부(居柒夫) 등이 『국사(國史)』를 편찬했다. 고구려는 국초(國初)에 『유기(留記)』 100권이 있었고, 영양왕 재위 11년(600)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신집(新集)』 5권을 편찬했다고 전한다. 안타깝게도 『서기』 『국사』 『유기』 『신집』은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이 사서들이 현전했다면 식민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따위의 못된 장난을 치지도 못했을 것이다.

 삼국은 국력이 급속히 신장할 때 자국사(自國史)를 편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백제 근초고왕은 재위 26년(371) 겨울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해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신라 진흥왕은 한강 하류지역을 장악하고 백제 성왕을 전사시켰다. 또한 경남 창녕에서 함경도 황초령까지 4개의 순수비(巡狩碑)를 세우면서 스스로를 황제의 자칭인 짐(朕)이라 부르고 태창(泰昌)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썼다. 고구려 영양왕은 어떤가? 중원을 통일한 수(隋) 문제(文帝)가 모욕하는 국서를 보내오자 재위 9년(598)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국경인 요하(遼河)를 건너 요서(遼西)를 선제 공격했다. 수나라가 30만 대군으로 반격해 왔지만 10에 8~9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고 2년 후에 『신집』을 편찬했다.

 광복(光復) 66년. 대한민국의 국력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크게 신장했지만 그간 국사교과서는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지속적으로 들어왔다. 대표적인 것이 일인 학자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補)가 1892년 『조선사(朝鮮史)』를 쓰면서 짜놓은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 아직도 남의 시각으로 쓴 역사 서술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국사 필수과목화에서 그치지 말고 선조들의 국사 서술 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국사를 신찬(新撰)할 때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