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배명복의 세상읽기

겸손한 지도자, 오만한 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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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9·11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 사살 경과를 국민에게 보고하면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겸손했다. 공을 자신에게 돌리지 않았다.

 “이 성과를 이루기 위해 정보와 대(對)테러 분야에서 불철주야 애써온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들의 이름을 우리가 알지 못하고,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그들은 만족스러운 임무수행을 통해 정의 실현에 기여했습니다. 직접 이번 작전을 수행한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프로페셔널리즘과 애국심, 그리고 조국을 위한 용기의 진정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 동부시간으로 1일 밤 11시35분, 텔레비전에 나와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빈 라덴을 겨냥한 ‘제로니모 작전’에 관한 대국민 보고였다. 9분간의 연설은 겸손과 절제의 힘을 보여준 명문(名文)이다. 그는 흥분하지 않았다. 차분했다. 정치적으로 더할 나위 없는 메가톤급 호재(好材)임에도 그는 공을 아랫사람들에게 돌리는 리더의 성숙함을 보여줬다. 지성과 인격의 힘이라고 나는 믿는다.

 미국인들이 자주 쓰는 표현에 ‘Don’t push your luck’이란 표현이 있다. 행운이 찾아왔을 때 조심하란 뜻이다. 좋다고 까불다가 굴러온 복을 차버리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다. 오바마는 전범을 보여줬다. 테러와의 전쟁을 최종 책임지고 있는 군통수권자로서 자신이 관여한 부분은 있는 그대로 건조하게 설명하고, 대신 아랫사람을 치켜세웠다. 그럼으로써 되레 자신의 판단과 결단을 돋보이게 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일러스트=강일구]



 조그만 업적이라도 생기면 마치 자신이 다 한 것처럼 떠벌리는 부박(浮薄)한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공(功)은 자신이 차지하고, 과(過)는 아랫사람에게 돌리는 낯두꺼운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오바마의 이 연설을 다시 들으며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오바마는 ‘승리’라는 과장된 표현은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3000여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간 9·11테러의 주범이 피로써 심판을 받았는데도 그는 “아직 테러와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전임자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 후 ‘임무 완수’라고 섣불리 선언했다가 곤욕을 치렀던 사례에서 배운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성명 발표 전에 전임자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빈 라덴 사살 소식을 전해주는 예의를 갖췄다. 부시는 후임자의 업적을 축하하는 성명으로 화답했다.

 내가 그의 연설에서 특히 주목한 대목은 미국적 가치를 언급하며 국민적 단합을 호소한 마지막 부분이다. 그는 9·11테러 직후 미국을 하나로 묶었던 단합된 정신을 상기시키고, “우리가 뜻한 바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신(神) 앞에서 분열될 수 없고, 자유와 정의가 모두와 함께하는 하나의 나라이기 때문임을 기억합시다”는 말로 연설을 맺었다. 국민적 트라우마와 국가적 비극의 원흉을 처단한 그 순간을 미국적 가치 아래 다시 단결하는 통합의 기회로 활용한 것이다.

 빈 라덴의 사살이 그에게 얼마나 정치적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할지 나는 모른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그로서는 일단 호재임에 틀림없지만 효과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미지수다. 북아프리카와 중동의 민주화 바람에 우왕좌왕하며 수세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비판을 얼마나 잠재울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굿 뉴스에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대응할 줄 아는 성숙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어준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오바마는 좌우 양쪽에서 욕을 먹고 있다. 그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오바마가 여전히 너무 왼쪽이라고 비판하고,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집권한 뒤 너무 오른쪽으로 가고 있다고 비판한다. 제대로 된 지도자라면 양쪽에서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정치란 서로 다른 의견 사이에서 공통분모, 즉 ‘커먼 그라운드(common ground)’를 찾는 중용(中庸)의 미학이다. 오바마가 퍼블릭 옵션까지 포함한 완벽한 공공의료보험 도입을 끝까지 우겼더라면 100년 만의 의보 개혁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공화당이 요구하는 385억 달러의 복지예산 삭감에 끝까지 반대했다면 어떻게 올 예산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을까.

 철학과 원칙을 저버리고, 지지자들을 배반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클릭을 조정해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정략적 꼼수 때문인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진정한 고민의 결과인지 유권자들은 알기 때문에 하는 소리다. 나만 옳다고 우기며 끝까지 밀어붙이는 옹고집도 혐오스럽지만, 얄팍한 계산에 따라 원칙 없이 왔다 갔다 하는 것도 혐오스럽다. 유권자들의 지적 수준을 무시하는 지도자에게는 현재도 없고, 미래도 없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다. 4·27 재·보선 결과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지도자는 겸손해야 한다. 공을 아래로 돌릴 줄 알고,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겸손은 지성과 인격에서 나온다. 그런 지도자를 갖고 있다는 것이 미국의 힘이고, 복이다.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