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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일본은 선봉에 설 수 없다

중앙일보

입력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새로운 세기는 ‘아시아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을 앞세운 아시아가 효율적이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로 빛을 발하리라는 것이었다. 새로운 세기가 아시아의 것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일본이 그 선봉이 될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그 이유는 중국의 강성(强盛)
때문만이 아니라 변화에 대한 일본의 저항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일본을 방문해 보면 위기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도쿄(東京)
는 여전히 활력에 넘치고 혼잡하다. 그러나 그 외적인 번영의 저변에는 두 가지 뿌리깊은 문제가 감춰져 있다. 낮은 경제성장률과 낮은 출산율이 그것이다.

80년대 일본 경제의 연평균 성장률은 약 4%로 미국의 3%를 앞질렀다. 일본 기업들은 세계의 기술과 금융을 지배할 기세였다. 그러나 90년대 상황은 완전히 역전됐다. 일본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1.5%로 미국의 절반에 불과했다. 일본의 세계 기술과 금융 지배 전망도 사라졌다.

성장 둔화만으로 일본 같은 부국의 경제가 절름발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낮은 출산율은 점진적인 인구감소를 통해 일본의 활력을 위협한다. 이민이 없는 상태에서 성인 여성의 평균 자녀수가 둘일 경우 그 나라의 인구는 현상을 유지한다. 美 인구통계국에 따르면 현재 일본 여성의 평균 자녀수는 1.5명이다. 1억2천6백만 명인 일본 인구는 2050년이 되면 1억1백만 명으로 감소할 것으로 추산된다. 65세 이상자가 전체 인구의 3분의 1로 현재의 17%보다 현저히 늘어나게 될 것이다. 물론 대다수 선진국이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지만 일본은 특히 변화에 적응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경제를 마비시킨 것은 사회적 기호와 경제적 필요성 간의 충돌이다. 80년대 중반 일본의 수출주도형 경제는 제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격이 되고 말았다. 막대한 무역흑자가 엔高와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 약화를 초래한 것이다. 명백한 해결책은 수출 수요를 내수(內需)
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일본이 사회적인 이유 때문에 국내 산업(농업·금융업·소규모 소매업)
을 보호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직업안정이라는 전통을 중시했다. 정부의 규제와 민간의 관습은 경쟁을 억제했다. 그러나 경쟁이 없으면 내수 진작과 직업안정에 필요한 신상품 개발 및 가격인하가 이뤄질 수 없다. 편의주의적인 경제정책(저금리, 대규모 예산적자)
의 비효율성이 드러나는 가운데 규제는 마지 못한 듯 서서히 완화됐다.

일부 산업(예를 들면 이동전화)
에서의 규제완화는 눈부신 성공을 거뒀다. 94년 이후 이동전화 소유 가구수가 2%에서 36%로 급증했다. 인터넷 기업 등 신생 업체를 지원하는 벤처 자본 업체들도 늘고 있다. 외국 기업들의 기업 인수·합병 참여에 대한 보이지 않는 규제가 완화됐으며 일본인 인재 채용도 한결 쉬워졌다.
그런 변화의 발걸음을 과거의 족쇄가 무겁게 잡아끌고 있다. 많은 기업들이 과잉 설비와 잉여 인력을 유지하고 있다. 투자금융 업체 골드먼 삭스에 따르면 화학업계에서는 15개 공장이 설비를 감축하고 있다. 일본전신전화(NTT)
는 최근 고용을 동결했으며 2003년까지 2만1천 개의 일자리를 없앨 계획이다. 정부의 막대한 예산적자는 결국 세금인상을 초래할 것이다.

일본의 강점(확고한 직업윤리, 기술력)
을 감안할 때 예상치 않은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낮은 출산율의 역전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일본의 주부는 오로지 자녀와 남편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젊은 여성들은 점차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거부하며, 취업기회가 확대되면서 결혼을 늦게 하거나 자녀를 갖지 않는다. 직장생활을 오래한 어느 여성은 “일본 여성은 자신들의 어머니를 보면서 환멸을 느낀다. 그들은 자녀와 남편을 위해 몸을 바쳤지만 그 대가로 무엇을 얻었는가”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사회나 변화에 적응하면서 사회안정과 사회적 가치 보존의 필요성에 직면한다. 미국과 일본의 접근방식은 아주 판이하다. 미국에서는 개인이든, 기업이든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쟁위협에 직면한 미국 기업은 그에 맞서지 않으면 망하는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미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미국의 개인주의적인 유산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반영하는 이와 같은 시스템은 많은 단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점차 그에 대응하는 법을 배워간다.

규제와 공동체적 가치에 대한 동조를 강조하는 일본의 접근방식은 변화를 관리하려 한다. 이 시스템은 국가적인 방향감각을 명확히 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변화의 억제를 변화의 관리로 착각하는 시스템은 환상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 결과 저항할 수 없는 압력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수준까지 쌓이게 되는 것이다. 이상은 일본에 대한 90년대 현실평가였다.

Robert J. Samuelson 객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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