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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 벽두 씻김굿 한마당 '일식'

중앙일보

입력

'문화게릴라' 로 통하는 연극인 이윤택(48) 의 작업은 기본적으로 1980년대의 산물이다. 본인도 "80년대의 주제를 초지일관 견지해왔다" 고 밝힌다. 사회.역사.정치를 주시하고 있다는 뜻이다.

1986년 부산에서 가마골 소극장을 만들며 본격 연극인생에 뛰어든 그가 지난 14년을 정리하는 무대를 마련한다. 21일부터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일식' 이 그것. 일제에 굴복한 1백년 전을 돌아보며 과거의 한(恨) 을 훨훨 털어 버리자는 굿판을 벌인다.

'일식' 은 제법 묵중해 보인다. 한국 1백년의 수난사를 반추하는 까닭이다.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살해당하고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며 전봉준의 목이 잘리는 등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환기시킨다. 위정자의 실책에 따른 민중의 고통도 그린다.

전통 굿의 현대적 계승도 시도한다. 연희(演戱) 요소가 강한 경기도 도당굿을 바탕에 깔고 비나리(노래인 듯 말인 듯 중얼중얼하는 소리) 등 전통 화법.리듬을 상당 부분 원용한다.

그러나 관객은 결코 주눅들 필요가 없다. 현대판 뮤지컬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아무런 부담없이 즐겨도 될 정도로 전체 분위기는 경쾌하다.

문예회관 지하 연습장을 찾았을 때 연기자들은 신명나는 마당을 벌이고 있었다. 이윤택 특유의 재치와 익살이 중간중간 끼어들어 감칠 맛을 더한다.

'일식' 은 시작부터 흥미롭다. 처음 6분 동안 무대 중앙엔 컴퓨터 그래픽이 투사된다. 광화문 네거리에 걸친 해가 까맣게 타들어가는 모습이 장관이다. 해가 사라지면서 거리가 어둠에 잠기자 전기수리공들이 불을 켜러 다닌다.

이때 구한말 일본 낭인들이 무대를 습격한다. 현재와 과거가 섞어지는 것. 현실과 환상도 교차한다. 일본 낭인과 전기 수리공의 대결, 구한말의 갖은 굴욕적 사건, 여러 무속 신의 흥겨운 굿판 등이 펼쳐진다.

작곡가 원일이 창작한 국악 심포니가 작품 전체를 적시고, 50여 명의 출연진이 부르는 독창.중창.합창이 계속된다. 음악극 형식이다.

문제는 잃어버린 해를 어떻게 되살려 내느냐는 것. 신라 고승 월명사가 지었다는 '도솔가' 가 대안으로 제시된다. 명성황후 살해 당시 피신한 궁녀 유실이와 현대의 젊은 시인 갑남이 노래를 지어 부르자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막바지에선 검게 탄 명성황후의 영혼이 비로소 액을 벗고 아름다운 자태를 되찾게 된다. 일종의 신화적 상상력을 동원한 것. 이윤택은 "주제는 무겁게, 진행은 가볍게" 로 표현한다.

옛 무당들이 세상이 바뀔 때 나라굿을 했듯 2000년 벽두에 한판 굿을 벌여보잔다. 해원(解寃) 없이 새 세상이 오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30일까지. 평일 오후 7시30분, 토 오후 4시.7시30분, 일 오후 3시.6시30분. 02-763-1268, 02-762-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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