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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푼젤 자매’의 아름다운 선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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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허리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을 잘라 또래의 소아암 환자들에게 기부한 배지원(9·왼쪽)·지영(5)자매와 어머니 이은아(40·가운데)씨가 서울 노원구의 집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이한길 기자]


지난 24일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 초인종을 누르자 여자아이 두 명이 달려나와 배에 양손을 얹고는 “안녕하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배지원(9)·지영(5) 자매. 초등학교 3학년과 유치원생인 두 아이는 단발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자매는 지난 1월 허리까지 길렀던 머리카락을 30㎝나 잘랐다. 독한 항암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없는 또래 소아암 환자들의 가발을 만드는 데 쓰기 위해서다. 자매가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건 3년 전인 2008년. 당시 어머니 이은아(40)씨는 TV에서 우연히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기부하는 가족의 이야기를 접했다. 아이들에게 누군가를 돕는 기쁨을 가르쳐주고 싶어 당시 여섯 살과 두 살이던 자매를 설득했다. 이씨는 “엄마가 하자고 하니까 어린 나이에 뭔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겠죠”라며 웃었다.

지난 3월 자매가 국제날개달기운동본부에 보낸 머리카락과 편지. 편지엔 “더욱 힘내서 건강하게 지내”라고 썼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직장에 다니는 이씨는 매일 아침마다 가족의 식사를 챙기고, 출근 준비를 하고, 두 딸의 머리를 빗고 땋아줘야 했다. 아이들은 매번 머리를 다른 모양으로 땋아달라며 투정을 부리곤 했다. 일주일에 두세 번 두 딸의 머리를 감기고 말리는 데만 한 시간 남짓 걸렸다. 친척들은 “안 그래도 예쁜데 머리까지 기르면 나쁜 사람들이 잡아간다”는 걱정도 했다. 자주 잃어버리는 머리끈과 샴푸값도 부담이었다.

 이씨는 그러나 “정성 들여 기른 머리카락을 기부할 때 아이들이 얻게 된 보람, 엄마로서 딸의 머리를 빗겨주며 느끼는 행복에 비하면 고생은 작은 부분”이라고 했다. 자매는 서로 토닥거리다가도 나란히 앉아 머리를 땋다 보면 자연스레 화해를 하곤 했다.

머리를 곱게 땋은 자매가 같은 옷을 맞춰 입고 외출하면 동네 주민들은 “너무 예쁘다”며 눈을 떼지 못했다. 자매는 “왜 머리를 기르냐”는 질문에 항상 “아픈 친구들 가발 만들어 줄 거예요”라고 답했다.

 동화 속 주인공 라푼젤만큼이나 길었던 머리를 자르던 1월 16일, 지원이는 자른 머리카락을 양손 가득 쥐고는 아쉬워했다. 그러나 “소아암에 걸린 친구들은 외출할 때 모자 대신 가발을 쓰는 게 소원”이라는 엄마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두 자매의 머리카락은 지난 3월 국제날개달기운동본부에 기증됐다. 환자들에게 쓴 편지에는 “더욱 더 힘내서 건강하게 지내”라고 썼다. 지영이는 “어서 머리가 빨리 자라서 또 기부하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그래서 단백질이 많이 든 고기를 열심히 먹는다.

 두 자매의 모발은 가발로 만들어져 이달 말께 환자들에게 전달될 예정이다. 국제날개달기운동본부는 지난해 920여 명에게서 머리카락을 기증받아 70명의 환자에게 가발을 만들어줬다.

글, 사진=이한길 기자

◆라푼젤=마녀의 마법 때문에 평생 탑에 갇혀 지낸 동화의 주인공. 21m 길이의 긴 머리를 늘어뜨려 자신을 구하러 온 왕자를 탑으로 올라오게 한다. 지난 2월 같은 이름의 디즈니 만화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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