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미국 신용등급 하락의 진짜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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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종수
논설위원
경제부문 선임기자

미국의 국가신용도가 드디어(?) 도마에 올랐다. 지난주 미국의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을 사상 처음으로 ‘부정적’으로 내리면서부터다. 여기서 굳이 ‘드디어’란 표현을 쓴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동안 가능성이 전혀 없을 것 같았던 미국의 국가신용도 하락 문제가 ‘드디어’ 논의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동안 누적된 미국의 재정적자와 국가부채 문제가 ‘드디어’ 국가신용도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현안으로 떠올랐다는 것이다.

  국가신용등급은 국가가 발행한 채권(미국은 재무부증권)의 원리금을 상환하지 못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에 따라 매겨진다. 한마디로 국가부도의 위험성을 따지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 국채는 국제금융시장에서 부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무위험자산으로 인정돼 왔다. 아시아 주요국들이 외환보유액의 상당 부분을 미국 국채로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 안전성에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당장 미국의 신용등급이 떨어진 것은 아니라지만, 앞으로 재정부실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신용등급이 떨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정도 충격이면 벌써 미국 국채값이 떨어지고(수익률이 올라가고), 채무 불이행 위험에 대한 가산금리 격인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급등했어야 옳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미국 국채 가격은 오히려 올랐고, CDS 프리미엄도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했다. S&P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평가하는 미국의 국가신용도는 끄떡없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때 국가신용등급 하락으로 우리나라가 얼마나 큰 타격을 입었는지를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국가신용평가의 위력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최근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와 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이미 재정위기가 불거진 다음에 나온 신용평가사들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조치에도 나라 전체가 휘청거릴 정도다.



 이에 비해 미국 정부는 오스턴 굴즈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이 “S&P의 평가는 정치적 판단일 뿐이어서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일축할 정도로 오만하다. 국제금융시장도 S&P의 평가를 미국 정치권에 대해 재정적자 감축에 나서라는 구두 경고쯤으로 받아들이는 모양이다.

 미국이 다른 나라와 달리 국가신용도에 그다지 연연하지 않고, 실제로 이번 S&P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는 달러화가 세계의 기축통화이기 때문이다. 기축통화국의 이점은 아무리 신용도가 떨어져도 국가부도에 몰릴 위험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재정적자를 국채를 발행해서 메우고, 국채의 원리금 상환은 돈을 더 찍어내서 막으면 그만이다. 이것은 다른 나라는 불가능하고 오직 기축통화국인 미국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달러화로 발행되는 미국 국채는 미국 입장에선 국내 채권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나라 같은 변방의 작은 나라가 달러표시 채권을 발행하면 외채가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위기가 닥쳐 외채 상환 요구가 들어올 때 달러를 (외환보유액으로)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면 당장 국가부도 위기에 몰린다. 이런 경우 미국은 그저 달러를 더 찍으면 된다. 지금까지 미국이 막대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가지고도 끄떡없이 버텨온 이유다.

  그러나 미국이 언제까지 이런 식의 방만한 재정운용을 계속할 수 있을까. 당장 달러화는 기축통화로서의 막강했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전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차지하는 달러의 비중은 지난 10년간 70%에서 60%로 줄었다. 프랑스는 올해 G20 정상회의 주요 의제로 국제통화체제의 변경을 거론하고 있고, 브릭스(중국·인도·브라질·러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 정상들은 아예 대놓고 달러 중심체제 대신 국제통화기금(IMF) 특별인출권(SDR)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고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미국 국내적으로도 달러를 마구 찍어내기 어렵게 됐다. 미국은 2차 양적완화 조치가 종료되는 것과 함께, 의회가 한도를 늘려주지 않는 한 국채를 더 발행할 수 없게 된다. 이미 엄청나게 풀린 돈을 감안하면 인플레 우려 때문에라도 달러를 더 찍어내기 어렵다. 이미 달러화의 약세는 대세가 돼 버렸다. 미국 내 일각에서는 차제에 기축통화의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자는 소리도 나온다. 심지어 미국의 재정 건전화와 경제 재건을 위해서는 선별적인 채무 불이행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결국 미국은 자의든 타의든 언젠가는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 상황이 언제 온다고 단정적으로 예상할 순 없지만, 그 개연성은 언제나 열려 있고, 어쩌면 쓰나미처럼 급작스럽게 닥칠 수도 있다. S&P의 평가는 그 전조인지도 모른다.

김종수 논설위원·경제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