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둠’도 “금 사라”는 시대…금은방엔 팔러 오는 사람이 더 많더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23일 서울 신대방동에 위치한 한 금은방 유리벽에 ‘이빨 금 사요’란 글이 붙어 있다. 이 가게 주인은 “귀금속을 사들이는 업자가 ‘금니도 취급하니 좀 모아 달라’고 하더라”고 말했다. [김형수 기자]


금값이 거침없이 오르면서 새로운 풍속도가 나타나고 있다. 금니를 전문으로 구입하는 업체들이 생겨나고, 치과에서 충치 치료를 받은 사람들은 떼어낸 작은 금니 조각까지 챙겨간다. 귀금속 상가엔 금을 사려는 사람들이 급감했다. 3.75g(한 돈)짜리 돌 반지 구입을 부담스러워하는 이들이 늘자 금 1g짜리 돌 반지까지 등장했다.

금값이 오르자 대표적 대체재인 은값도 덩달아 뛰고 있다. ‘금 펀드’ ‘미니 금’ 등의 ‘금 테크’도 활발하다.

서울의 한 금은방에 순금으로 만든 거북이와 두꺼비가 진열돼 있다. 한국물가협회에 따르면 금 시세는 20일 현재 3.75g에 23만970원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올 3월 새롭게 문을 연 골드세븐은 금니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업체다. 무료로 e-메일 사진 감정을 해주는 이 업체에는 하루에 10여 건 이상의 감정 문의가 들어온다. 금니를 우편으로 보내면 금 시세대로 값을 쳐 통장으로 입금해 준다. 금니의 크기나 금 함량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4만~10만원 선에서 거래가 이뤄진다. 개업 후 한 달여간 이곳에서 금니를 처분한 사람만 5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금니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업체가 등장하고 1g짜리 돌 반지와 14K나 18K 대신 9K 커플링이 나오는 등 연일 최고가를 경신하는 금값이 거래 풍속도를 바꿔놓고 있다.

 골드세븐은 원래 치과를 상대로 금니를 모아 처리하던 폐금전문 처리업체였다. 그러다 인터넷 사이트를 개설하고 일반인들로부터 금니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은 치과에서 거둬들이는 금니 양이 줄었기 때문이다. 골드세븐 측은 “금값이 오르면서 치과에서 치료 뒤 버리는 금니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늘었다”며 “이미 인터넷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금니 전문업체가 성업 중”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서울 종로에서 치과를 운영 중인 한 개업의는 “충치 치료 후 덧씌우는 금의 경우 크기가 작은 데다 금 함량도 많지 않아 예전에는 챙겨가는 환자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라고 말했다. 떼어낸 금니는 챙겨가고 새로 씌울 때는 금보다 아말감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손님 10명 중 6~7명이 팔러 오는 사람”=22일 종로귀금속상가. ‘금 고가 매입’이라는 팻말을 써붙이지 않은 상점이 없었다. 20년째 귀금속 상가를 운영하는 박모(57)씨는 “물건을 팔아서 먹고사는 게 아니라 사들여 먹고산다”고 했다. 하루에 10명의 손님이 찾아오면 그중 6~7명은 팔러 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는 “종로 상가는 대부분 동네 금은방 주인이 찾는데, 요즘은 동네 금은방이 고사 직전이라 손님이 없다”고 울상을 지었다. 그 역시 귀금속이나 명품시계를 매입해 처리업자에게 팔아 그 수수료로 가게를 꾸려나가고 있다. 또 다른 점주 김모(60)씨는 “지난달에는 전시돼 있던 제품을 팔아서 임대료를 냈다”며 “살 때보다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에 문을 닫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사정이 이렇자 금 매입 전문점도 늘었다. 한 금 매입업자는 “소매상은 줄고 매입상은 자고 일어나면 생긴다. 사들인 금을 녹여 중국 등지로 파는 전문업자까지 등장했다”고 소개했다.

 ◆금은방 최대 고객은 신혼부부=3년 전만 해도 종로귀금속상가에서 가장 큰 손님은 30~50대 여성이었다. 화려한 디자인의 귀금속이 인기였고 귀걸이·목걸이가 세트를 이룬 상품이 잘나갔다. 하지만 금값이 오르면서 이런 손님이 뚝 끊겼다.

 대신 신혼부부가 가장 귀한 손님이 됐다. 아무리 금값이 올라도 결혼 예물은 생략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예물을 간소화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금 세공업체를 운영하는 김기준(50)씨는 “예전엔 목걸이·귀걸이·반지 세트를 금·다이아몬드·진주 이렇게 3세트 장만하는 게 보통이었다면 지금은 금 세트로만 한다”고 했다. 그렇게 줄여도 금값이 워낙 비싸 가격은 300만원대로 비슷하다. 100만원 선에서 반지만 마련하는 부부도 늘어 결혼 예물인지 모르고 파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보석 전문업체 미니골드는 최근 9K 다이아몬드 반지 세트를 내놓았다. 일명 ‘참깨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9K 반지 세트의 가격은 19만9000원. 미니골드 측은 “가격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금 함량을 줄이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신세계백화점은 29일부터 다음달 24일까지 강남점·본점·센텀시티점·경기점에서 10K 금 보석 제품을 파는 ‘10K 라이트 골드 컬렉션’을 진행할 예정이다. 귀걸이 등 단품은 10만~20만원, 커플링 세트는 20만~30만원 정도 한다.

 종로귀금속상가에는 1g짜리 돌반지도 나왔다. 금세공업과 소매업을 같이하는 최모(56)씨는 “금값이 하도 올라 1g짜리 돌 반지를 만들어 매장에 전시해 놨다”고 했다. 한국귀금속협회도 5월 중 ‘1g짜리 돌 반지’를 내놓기 위해 상인들과 협의 중이다.

 ◆은값도 덩달아 뛰어=최근 석 달 사이 은값도 급등하는 추세다. 1월 초만 해도 3.75g에 5000원 선이던 게 지난 20일에는 6700원까지 올랐다. 한 금 매입업자는 “금값이 오르면서 금 대신 은을 쓰는 경우가 늘었다”며 “은이 금보다 더 가파르게 올라서 업자들은 은을 사들이는 데 관심이 더 많다”고 했다. 실제로 한 귀금속 상인은 “금을 팔러 온 사람들에게 은수저 같은 은제품도 있으면 팔라고 권한다”고 말했다.

정선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