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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하에 서릿발 같으면서도 젊은 병사 애정문제까지 챙겨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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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호 06면

이순신은 어린 시절을 충남 아산에서 보내며 무예를 닦았다. 아산 현충사는 그런 충무공을 기리는 장소다. 현충사 입구는 공의 충성심을 기리는 의미에서 ‘충의문’으로 부른다. [현충사 제공]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물론 인간적 면모까지 엿볼 수 있는 ‘안내서’로 소설가 김훈(63·사진)의 장편소설 『칼의 노래』가 있다. 2001년 출간돼 평소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중장년 남성층을 독자로 끌어들이며 단숨에 100만 부 넘게 팔렸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 형국인데도 정쟁에 매달리는 임금과 조정에 대한 환멸, 도탄에 빠진 백성에 대한 연민, 무엇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 이순신의 내적 번민 등을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문체에 담아낸 게 주효했다.

이순신 탄신 466주년 김훈이 말하는 충무공의 3대 리더십

기록 속에 박제화된 ‘성웅 이순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간 이순신’을 되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강금실 변호사가 감명 깊게 읽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4월 28일 이순신 장군의 탄신일(양력)을 닷새 앞둔 23일 오후 소설가 김훈씨를 찾았다. 그는 정약전을 둘러싼 천주교 박해사를 소재로 한 새 장편소설 집필을 위해 이달 초부터 경기도 안산시 선감동 경기창작센터에 입주해 있다. 전날 “찾아가겠다”고 전화를 넣었더니 대뜸 『난중일기』와 이순신 장군이 임금에게 써 보낸 일종의 전황보고서인 장계(狀啓)를 모은 『임진장초』를 가지고 내려오라고 했다. “소설을 쓴 지 오래됐으니 자료를 보며 설명해주겠다”는 거였다.

작가가 준비한 얘기는 ‘기록에 나타난 이순신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이순신 장군이 전쟁터에서 발휘한 힘의 대부분은 사실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사실의 리더십’이다. “당시 문인 권력은 당파에 매몰돼 동서로 나뉘어 고질적인 당쟁만을 일삼았는데 이순신은 바다에서 벌어지는 사실에 입각해 주요 사안에 대한 결정을 내렸고 이게 힘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사실을 중시한 이순신의 면모가 『난중일기』 『임진장초』 등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는 설명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충무공 영정. 아산 현충원에 있다. 1952~53년 장우성 화백이 그려 73년 문화공보부가 표준 영정으로 정했다.

이순신 리더십의 두 번째 덕목은 모순된 것들을 하나의 인격 안에 끌어안는 일종의 ‘포용의 리더십’이다. 김씨는 “문제를 일으킨 부하들을 처벌하는 대목만 『난중일기』에 123차례나 등장한다”고 했다. ‘문제 사병’들은 상당수 처형됐다. 김씨는 “이순신은 부하들에게 그렇게 엄격했으면서도 피 끓는 젊은 부하들의 애정관계를 파악하고 있었을 정도로 인간적인 면모도 갖추고 있었다”고 했다. 서릿발처럼 엄격하면서도 자상한 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침묵의 리더십’이다. 김씨는 “이순신은 모함을 당해 관직을 박탈당하고 서울로 압송돼 40여 일 옥에 갇혀 여러 차례 고문을 당했을 텐데도 『난중일기』 어디에도 고문을 당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했다. “사사로운 원한이나 개인적 욕심에 구애받지 않는, 보다 큰 틀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적 기록인 『난중일기』에도 이를 밝히지 않고 입을 다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침묵의 리더십’이다.

김씨는 “사실을 챙기는 이순신의 힘은 정말 놀라운 것”이라며 “『난중일기』의 거의 모든 페이지에 그런 면모가 나타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진년(1592년) 2월 1일 일기를 들었다. 일기는 ‘안개가 끼고 비가 잠시 내리다가 늦게 갬’이라고 날씨부터 적고 있다. 이어 ‘새벽에 망궐례를 올렸다. 선상에 나가서 쓸 만한 널빤지를 고르는데 마침 피라미 떼가 웅덩이 안으로 몰려들었기에 그물을 쳐서 2000여 마리를 잡았다’라고 적었다.

김씨는 “나는 2000여 마리라고 구체적으로 쓴 게 놀랍다”고 했다. “최고지휘관이 생선 마릿수를 직접 셌을 리는 없을 테고 부하들이 보고한 것일 테지만 빼놓지 않고 일기에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이순신이 사물을 정확한 사실에 입각해 파악하는 습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김씨는 “어떤 날의 일기에는 청어 1130마리, 말린 생선 202두릅 등 잡은 물고기 수를 한 자릿수까지 정확하게 기록했다”고 말했다. 또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남긴 1598년 10월의 일기에는 지방 백성으로부터 받은 군량미를 ‘쌀 4되’ 단위까지 밝혀 적었다”고 했다.

김씨는 “쌀 4되라는 것은 거대한 군사 조직 앞에서는 정말 한 움큼밖에 안 되는 적은 양”이라며 “당시 그의 부대가 처했던 가난과 고통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그런 사실을 기록하던 장군의 겸허한 태도가 느껴진다”고 했다.

김씨는 “사실을 중시한 이순신의 면모는 『임진장초』에 더 잘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1592년 4월 15일 왕에게 보낸 ‘사변에 대비하는 일을 아뢰는 계본’이라는 편지를 예로 들었다. 편지는 ‘4월 14일 발송돼 오늘 4월 15일 술시에 접수한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원균의 공문에…’라고 시작한다. 원균의 공문에 따르면 ‘부산포에 나타난 왜선 90척이 세견선(무역선)으로 보이지만 혹시 몰라 소속 관포(官浦)에 지시해 사변에 대비하겠다’고 적혀 있으나, 이순신 자신이 보기엔 세견선 선단으로는 심상치 않기 때문에 수군절도사 등에게 긴급히 통고했다는 내용이다.

김씨는 “공문 문장이 신문사 경찰기자가 기사 쓰듯이 육하원칙에 입각해, 편지를 주고받은 시간을 먼저 쓰고 그 다음 객관적으로 내용을 적어 내려간 점이 놀랍다”고 했다. 또 원균에게 공문을 받은 즉시 왕에게 두 시간 안에 장계를 보낸 신속함, 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두 시간 동안 필요한 조치를 취한 점 등 비상 상황에 대처하는 데 있어 불분명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사물의 밑바탕을 챙길 줄 아는 사실적 정신, 사실에 바탕해 전쟁을 수행한 점 등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순신의 그 같은 사실에 입각한 리더십이 오늘날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를 물었다. 최근 검찰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검찰을 강하게 질타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김씨는 말을 아꼈다. 하지만 “요즘은 사실의 언어가 아니라 신념의 언어가 너무 난무하는 것 같다”고 했다. 김씨가 생각하는 신념의 언어란 언론은 물론 잇속 챙기기에 바쁜 정치권의 언어를 가리키는 듯했다.
김씨는 “최근 국사 과목이 고등학교 필수과목으로 선정된 것은 100% 잘된 일이지만 앞으로 어떤 내용을 학생들에게 가르칠지에 대해서는 거대한 논란이 예상된다”고 했다. 당파성이 아닌 사실에 입각한 이순신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말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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