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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나를 파괴할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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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

내가 아는 창조적 인간들의 삶엔 뚜렷한 공통점이 있다. 일종의 자폭(自爆)이다. 지난해 작고한 작가 이윤기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했다. 어렵게 이룬 성취에 기뻐할 만도 하건만 그는 외려 어 뜨거라, 문단에서 자취를 감췄다. “입산을 해버린 거지. 소설은 쉰 살부터 쓰겠다, 우리 문학은 퍼내야 할 연못이 연못답지 못하다, 나는 그걸 더 넓혀 오래 퍼 쓰겠다. 그래서 번역가가 됐고, 20년간 200권을 (그 연못에) 새로 보탰어요.” 쉰 살, 마침내 소설가의 길로 들어선 그는 단번에 동인문학상과 대산문학상을 거머쥐었다. 53세 때 내놓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 이 땅에 인문학 바람을 일으켰다.

 팬택계열 부회장 박병엽은 스물아홉이던 91년 사업을 시작했다. 87년 입사한 맥슨전자에서 일급 영업사원으로 이름을 날릴 때였다. “기사 딸린 차 나오지, 대기업 임원급만 오는 외부 회의도 혼자 들어갔어요.”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졌다. 제 정신이냐는 만류를 뿌리치고 삐삐 제조업체를 차렸다. 97년 매출이 762억원을 찍었다. “이게 꼭데기다 싶데요. 휴대전화를 만들겠다니 또 다들 미쳤대. 삼성·LG에 도전하는 거잖아요.” 2007년 초 무리한 투자로 자본잠식 상태에 빠졌다. 그만 했으면 됐다건만 기어코 전 재산을 밀어넣고 백의종군했다. 이후 팬택은 14분기 연속 흑자 행진 중이다. LG를 누르고 국내 2위 휴대전화 제조업체가 됐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기업으로 꼽히는 애플과 구글. 그들의 역사 또한 면면이 자기 파괴의 기록이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84년 매킨토시를 내놓았을 때 그의 목표는 전작인 ‘애플2’ PC를 단칼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2005년엔 ‘아이팟나노’로 ‘아이팟미니’를 죽였다. 이후 나온 ‘아이팟터치’가 아이폰에 고사당하고, 아이패드가 맥북(노트북PC) 시장을 잠식해 들어감에도 주저란 없다. 구글은 어떤가.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모바일 운영체제(OS) ‘안드로이드’를 세계에 개방해 버렸다. 구글맵스(지도), 구글어스(위성지도), 구글독스(문서작성프로그램)도 다 공짜다. 이로써 구글은 노키아·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기업들이 수십 년 쌓아올린 아성을 한번에 무너뜨렸다.

 손 안의 떡을 버리기가 어디 쉬울까. 시장 1등 기업이라면 더 그럴 게다. 문제는 그 파괴가 밖으로부터 시작됐을 때다. 정보기술(IT) 분야를 취재한 지 12년째다. 최근 17개월간의 변화가 이전 10년을 압도한다. 아이폰 덕이다. 한국은 세계 85번째 아이폰 출시국이다. 정부, 통신업체, 단말기 제조사들까지 나서 극구 문 열기를 꺼린 탓이다. 덕분에 그들은 물론 소비자, 엔지니어들까지 한동안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런 면에서 이미 대중화된 무료 문자·인터넷전화를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통신업체들, 공정위의 힘을 빌려 구글 모바일 검색에 대한 두려움을 감해 보려는 포털업체들의 요즘 행보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자신을 파괴할 권리와 기회를 언제까지 타인의 손에 던져둘 것인가. 이것은 생존을 넘어 존엄의 문제다.

이나리 경제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