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발 공포에 긴장하는 글로벌 시장…세계의 눈은 ‘용의 금고’로 쏠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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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가 18일(현지시간) 미국의 신용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낮췄다. S&P로선 처음이다. S&P가 국가 신용등급을 매기기 시작한 1941년 이후 미국엔 최고 등급인 ‘트리플A(AAA)’만을 부여했다. 신용전망도 70년 동안 시종일관 ‘안정적’이었다.

미국이 신용평가사로부터 경고를 먹은 일은 처음이 아니다.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6년 1월 옐로카드를 받았다. 그때도 미 정부의 부채 한도를 놓고 빚어진 백악관-의회 갈등이 화근이었다. 당시 무디스는 미국을 ‘신용 강등 대상’에 올렸다. 이번 S&P 신용전망은 강등보다 훨씬 부정적인 조치였다.

 그래서인지 이날 미 국채 값은 크게 요동치지 않았다. 국제 금값도 한때 들썩이는 듯했지만 안정을 되찾았다. 심지어 떨어지기까지 했다. 주가만 미끄러졌다. 미국과 유럽 주가는 1~2% 정도 떨어졌다.


 하지만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이날 “미 신용전망 강등이 찻잔 속 태풍으로 머물지는 않을 것 같다”고 예측했다. 신용전망 강등이 돌출적인 사건이 아니어서다. 2008년 금융위기의 2막으로 시작된 국가채무 위기의 연장선이기 때문이다. 2009년 말 그리스 채무위기가 불거진 이후 많은 전문가가 미국을 잠재 위기국으로 꼽았다. 그리스·아일랜드·포르투갈·스페인·일본…미국 순으로 국가채무 위기가 전염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장 미국이 신용전망 강등으로 위기에 빠질 가능성은 커보이지는 않는다. 백악관-의회 갈등이 극적으로 타결될 수 있어서다. 하지만 FT는 “단기적으로 글로벌 채권 긴장감이 고조되며 투자자들의 위험회피 현상이 커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투자자들이 겁을 먹어 국채시장이 위축될 수 있다는 얘기다.

 투자자들이 긴장하면 돈이 제대로 돌지 않아 금융시장 중심보다 주변부가 희생되곤 했다. 실제 조짐이 나타났다. 18일 글로벌 채권시장에선 변방인 그리스 국채 값이 급락했다. 이미 채무구조조정(워크아웃)이란 악재에다 미 신용전망 강등이 덮친 결과로 풀이됐다.

 주가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미국 뉴욕 주가가 1% 남짓 하락했다. 반면 유럽 주가는 2% 넘게 떨어졌다. FT는 “이번 사태가 국가 채무위기 당사국들이 모여 있는 유럽에 더 큰 충격을 줄 것이란 전망 때문”이라고 전했다. FT는 또 “미 신용전망 강등은 유럽 부채 위기국들이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일을 더욱 어렵게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미 신용전망 강등을 계기로 ‘트리플A 클럽’에서도 옥석 가리기가 진행될 듯하다. 트리플A 클럽은 신용등급 AAA인 나라들이다. 독일·프랑스·룩셈부르크 등 10여 개 나라다. 그룹 리더 격인 미국이 공식적으로 부정적이란 평가를 받았으니 다른 멤버들에 더 엄격한 잣대가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가장 먼저 트리플A 클럽에서 탈락할 후보로는 영국이 꼽혔다. 금융위기 이후 실물경제 상황이 계속 나빠지고 있다. 재정 상황도 좋아질 기미가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BBC방송이 “경제 상황을 감안하면 미국보다 영국이 먼저 경고받았어야 했다”고 보도할 정도다.

 신용전망 강등은 미 달러 가치에 적잖은 부담이 될 듯하다. 미 연방정부가 눈덩이처럼 불어난 부채에 허덕이고 있는 와중에 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쉽게 긴축에 나서기 힘들 듯하다. 존 우드(경제학) 미 펜실베이니아대 교수는 “국가부채 누적으로 정부의 신뢰성이 흔들리면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위축돼 통화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긴축에 나서기 아주 힘들다(우드 법칙)”고 말했다. 우드의 말대로라면 이번 사태는 버냉키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미 재무부 채권은 글로벌 자산시장의 기준점이다. 미 국채 값이 매겨지면 이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의 국채, 기업들이 발행한 회사채, 모기지 채권, 주식, 금 등의 값이 연쇄적으로 결정된다. 뮤추얼·헤지 펀드 매니저들이 포트폴리오를 구성하면서 어김없이 미 재무부 채권을 사 넣는 이유다. 이런 기준점의 신뢰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벌써 대안 찾기에 나선 금융회사도 있다. 세계 최대 채권펀드인 미 핌코의 수석 펀드매니저인 빌 그로스는 “우리는 미 재무부 채권을 거의 다 처분했다”며 “이번 신용전망 강등이 우리의 전략이 옳았음을 증명해 줬다”고 말했다.

 다른 펀드매니저들도 그로스의 전략을 좇을까. “당장은 아니다”라는 게 미 투자전문 인스티튜셔널인베스터스(IIS)지의 전망이다. 미국의 신용등급이 실제 강등될 가능성은 크지 않기 때문이란 이유다. 게다가 펀드매니저들이 당장 미 재무부 채권을 팔아치우고 다른 나라 국채를 기준점으로 삼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IIS는 지적했다. 이어 IIS는 “불안한 미 재무부 채권보다 더 신뢰할 만한 국채가 등장하면 자금이 쏠릴 가능성이 있다”며 “중국 정부의 채권이 가장 유력한 후보일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날이 오면 금융 역사가들은 이번 신용전망 강등이 미 금융패권 붕괴의 방아쇠였다고 의미를 부여할지도 모른다.

강남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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