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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18)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눈물 9

나는 창을 통해 뒤뜰을 바라보았다. 철문의 한 끝이 보였다. 소나무 숲 사잇길로 올라가면 그 철문으로 막힌 동굴 어귀가 나왔다. 진즉부터 한번 들어가 보고 싶었던 동굴이었다. “옷을 갈아입어야 돼요.” 우는 애기보살을 일으켜 세우고 옷을 입혔다. 애기보살은 울면서도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처럼 가만히 있었다. 아랫배가 볼록했다. 그곳이 눈물주머니인 모양이었다. 귀여운 눈물주머니. 화마로 휩싸인 단식원 옆 숙소건물의 불빛이 창유리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비명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배를 보니, 다이어트 해야겠어요, 우리 애기보살님!”
내가 히힛,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청바지 위로 노란 후드티를 입고 나자 애기보살은 그냥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나는 애기보살이 불타는 숙소건물을 똑바로 보지 못하게 유의하면서, 손을 잡은 채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동굴로 올라가는 길엔 지난 가을 떨어진 소나무 바늘잎들이 주홍색 주단처럼 깔려 있었다. 그곳은 이사장에 의해 말굽이 장착된 전투화가 화형에 처해졌던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어디쯤일까.
“한마디로, 화형이었어.”

말굽이 고백했던 말을 나는 똑똑히 기억했다.
이사장이 전투화를 태운 곳은 아마 이 소나무 숲 어디쯤이었을 터였다. 전투화의 몸통이 불타 없어지고 난 뒤 벌거숭이로 버려진 말굽이, 소태보다 더 쓴 고독 속에 여러 해 파묻혀 있던 어디쯤을 나는 지금 지나가고 있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낙엽이 떨어져 덮어주었으며,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위를 밟고 지나다녔다고 말굽은 말했다. “목마름보다 더 무서운 것은 버림받은 고독”이라고도 말굽은 말했고, “나를 부르는 새 주인이 있다면 지옥이라도 달려갔을 거”라고 말굽이 덧붙이던 것도 귓가에 생생했다.

내가 사천에서 남해로 가던 겨울저녁, 어느 어물창고 앞에서 자물통을 내려칠 때까지 말굽은 계속 버려져 있었다. “어느 날 깊은 밤에 나는 들었어. 나를 부르는 자네의 절실한 목소리…….”라는, 말굽의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간절하다면 거리와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도 이해했다. 우리는 피차 버림받은 자였고, 간절했고, 그러므로 시공을 넘어 한 몸뚱어리로 맺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맞아. 우리는 맺어진 거야!”라고, 나는 감회에 차서 중얼거렸다. 하나의 카르마가, 애당초 말굽이 ‘간절한 나의 목소리’를 듣고 떠나왔던 그 소나무 숲으로 돌아와, 이 푸르른 새벽, 비로소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나의 말굽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나의 말굽이 아니라, 마침내 내가 말굽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 말은 필요 없었다. 이미 팔의 상단과 어깨까지 말굽이 뻗어 나온 상태였다. 무겁진 않았다. 말굽은 영토만을 쫓아서 진화하는 게 아니라 갖가지로 진화를 거듭했다. 의식을 따라 시간까지도 넘어서게 될는지 몰랐다. 동굴의 철문 자물쇠는 열쇠가 꽂힌 채 열려 있었다. 이중으로 된 문이었고, 이중으로 된 자물쇠였다.
“애기보살님!”

나는 애기보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버지의 고향이 어딘지 아세요?”
“저기…….”
애기보살이 도시의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아득히 바라보았다.
“강을…… 따라 내려가면 나와요. 복숭아…… 과수원도 있어요.”
“조금 있으면 복숭아꽃도 피겠지요, 애기보살님. 그러니, 강을 따라 그곳으로 가세요. 미소보살님이 거기서 애기보살님을 기다릴지 몰라요. 이제 나는 저 철문으로 들어가 이사장님과 긴 얘기를 나눌 거예요. 이사장님의 은총을 받았거든요. 잘 들으세요, 애기보살님!”
“…….”

“내가 저 철문 안으로 들어가면 문을 닫고 밖에서 이 자물통을 이중으로 잠그세요. 꼭 잠가야 돼요. 그리고 곧장 떠나세요. 일주문으로 가면 절대 안 돼요. 단식원 쪽으로도 가지 마세요. 여기서, 소나무 숲을 똑바로 가로질러 저쪽으로 가면 저 너머, 울타리가 부서진 곳이 있을 거예요. 그리 나가서 언덕을 넘어요. 어떤 일이 있어도 돌아보지 마세요. 도시로 가는 길이 있을 거예요. 용감하게, 얼굴은 들고, 앞을 똑바로 보면서, 씩씩하게 걸으셔야 돼요. 애기보살님은, 더 이상 애기보살이 아니에요. 관음보살님이잖아요? 계(戒)를 받으셨는걸요. 관음보살은 아미타불의 왼쪽에 앉아서 자비로 세상을 구하는 보살님이세요. 열쇠는 가다가 강에 버리세요. 그리고,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마세요.”
관음보살을 상상하자 눈이 더 뜨거워졌다.
“돈이 필요할 거예요. 자, 여기요.”
나는 애기보살의 후드티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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