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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17)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눈물 8

백주사는 방에 없었다.
팬트하우스라 할 이사장의 방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무슨 소리가 안에서 우렁우렁하고 울려나왔다.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너른 거실을 지나서 깊숙이 들어간 방엔 여러 개의 모니터가 벽에 걸려 있었다. 샹그리라 건물의 모든 입구와 출구를 볼 수 있는 모니터였다. 카메라들은 어두컴컴한 주차장은 물론이고 샹그리라 뒷마당도 낱낱이 비춰주고 있었다. 이사장은 그럼 나의 동선도 이곳에서 낱낱이 보고 있었을 터였다. 여린의 안마용 침대와 침실 침대를 비추고 있는 모니터도 있었다. 이곳에 앉아서 이사장은 매일 그녀의 거실과 침실을 들여다보고 있었던가 보았다. 오늘은 아마 화면이 아니라 라이브로 보고 싶어 백주사를 따라 갔던 모양이었다. 침대엔 그녀가 반듯이 누워 있었다. 그녀가 자고 있다고, 나는 상상했다. 깊고 고요한 잠이었다.

“명안전으로 오게!”
이사장이 우렁우렁 말하고 있었다.
그 소리에 행여 잠든 여린이 깰까 싶어 나는 흠칫했다. 이사장은 왼쪽 끝 모니터 속에 들어 있었다. 내가 들어와 볼 때까지 화면이 반복해 돌아가도록 설정을 해놓은 것 같았다. 백 살도 넘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눈은 쑥 들어가고 광대뼈는 튀어나왔으나 모두 수천의 주름 밑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명안전으로 오게!” “명안전으로 오게!” 이사장이 계속 반복했다. 나에게 하는 말인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나를 부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선택받은 자로서, 당연히 기쁨을 느꼈다.

늘 오가던 산길을 따라 명안진사로 갔다.
암벽을 내려갈 때쯤 여명이 터오기 시작했다. 명안진사는 아주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공사는 멈출 것이고 모든 인부들 또한 쉴 터였다. 방구댁을 비롯해 사지가 그나마 성한 사람은 어제 오후 모두 외출한지라, 그곳엔 겨우 십여 명의 ‘패밀리’들만 잠들어 있었다. 숙소건물은 단층으로 한 동이었다. 나는 자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악취가 났다. 그래도 무슨 소리가 난다면 일제히 깨어나 울부짖을 테니,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들은 쓰레기였다. 모든 게 귀찮아서 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을 선택했다. 소각이 좋을 것 같았다. 밖에서 문을 잠그고 창을 막았다. 창은 두 개뿐이었고 넓지 않았다. 창에 각목을 대고 드릴로 못을 박을 때에야 사람 기척이 안에서 났다.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모르는 체했다. 석유는 가까운 곳에 여러 통이 있었다.
석유를 충분히 사용했다.

명안전으로 올라가는 비탈길은 비로 쓸어낸 것처럼 정갈하게 비어 있었다. 등 뒤에서 불에 갇힌 사람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났으나 잠깐뿐이었다. 산은 우뚝하고 골은 깊으니, 외부에서 화재사실을 손쉽게 발견하진 못할 터였다. 나는 오히려 고요한 새벽을 느꼈다. 워즈워드가 이르기를, 선과 악에 대해 어떤 현자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는 봄철 이른 새벽의 고요였다. 불현듯 얼마 전 이 길을 걸어 올라가던 곰 같은 미소보살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미소보살은 어디로 갔을까. 새떼들이 연방 숲에서 날아올랐다. 천지사방에 철쭉이 자지러지게 피어 있었다. 저 혼자 떨어져 비탈길로 뛰어내리는 꽃잎도 많았다. 피보다 붉은 꽃잎이었다. 나는 꽃길을 천천히 올라갔다. 바람도 불지 않는 아주 좋은 날씨였다.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한 숲이 수줍게 몸을 뒤채면서 수런수런 깨어나고 있었다.

명안전의 출입구도 열려 있었다.
이사장이 나를 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총애 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사장은 정작 안에 없었다. 이사장의 침상 위엔 어린 애기보살만이 실크슬립에 휘감긴 채 잠들어 있었다. 봄풀보다 더 여리고 앙증맞은 모습이었다. 가만히 애기보살을 내려다보았다. 애기보살은 잠든 게 아니라, 울고 있었다.
“울지…… 마세요, 관음보살님!”
애기보살이 우니까 나도 괜히 눈물이 났다.
“이…… 사장님, 저 뒤에서…… 기다리신다고 했어요…….”
눈을 뜨지 않은 채 애기보살이 명안전 뒤뜰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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