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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의사와 야쿠자, 죽음에 대한 다른 시각 두 가지

중앙일보

입력

죽음... 모두가 이것을 두려워 합니다. 사람들이 공포라고 표현하는 것의 궁극에는 항상 죽음이 커다랗게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자신이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지, 왜 공포를 느끼는지 정작 그 이유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역사상 수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인, 그리고 현자(賢者)와 성인(聖人)들이 이 문제에 도전을 해 봤습니다만, 결론은 한 군데로 모아지질 않았지요(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인생관이나 종교 등은 모두 하나가 되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어려운 문제의 원인이 무엇이고, 또 그것의 실체는 무엇인지 캐는 것보다는 죽음이라는 실체를 인정한 상태에서, 죽음 자체가 사람들의 삶에 어떻게(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1월 8일 개봉하는 〈행복한 장의사(감독 장문일)〉와 〈소나티네(감독 기따노 다께시)〉는 이런 범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영화들입니다. 하나는 장의사를 소재로 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야쿠자를 소재로 합니다. 두 영화 공히 등장인물의 직업이 죽음과 가깝다는 데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죽음 자체를 받아들이는 시각은 다릅니다.

●〈행복한 장의사〉

낙천면이라는 시골의 한 마을. 이 마을에서 장의사를 하는 장판돌(오현경) 노인에게는 할아버지가 가진 장의사를 팔아 빚을 청산해 보려는 손주 재현(임창정)이 있습니다. 재현은 장의일에 신념과 철학적인 직업의식을 가진 할아버지 장판돌과 갈등관계에 있지요.

그 둘 주변에는 무위도식하는 수퍼마켓 집 아들 대식(정은표)과 장의 일을 배워 보려는 철구(김창완)가 배치되고 있습니다. 철구는 장의 일 자체에 대해 엄청나게 상업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습니다.

죽은 자를 보내는 일, 그 자체를 장의 일의 의미라 생각하는 장판돌은 당연히 철구와도 갈등 관계에 있습니다. 대식은 별 생각 없이 따라 다니는 캐릭터이긴 하지만, 철구, 재현과도 다르기 때문에 오히려 장판돌이 가진 장의 일을 계승할 수 있는 적자라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 삼각적인 갈등의 대립관계를 매우 코믹적인 해프닝들의 진행 속에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죽음을 소재로 하지만, "행복한" 장의사라는 역설적인 제목 속에 그 소재는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요. 즉 이 영화의 죽음은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의미입니다.

화면은 매우 부드럽고 아련한 느낌(특히 시골 풍광이 그렇지요)을 주며, 때로는 몽환적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죽음, 그 자체가 주는 두려움과 같은 이미지와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영화는 이 "역설적인" 화면과 그리고 우습지만, 그렇다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망치지도 않는 희극적인 분위기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 세 청년들에게 소중한 의미였던 두 사람(특히 재현에게는 더욱 더 그러한)의 죽음은 이 영화의 주제와 이미지와 그리고 분위기 모두를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즉 죽음이란 결코 공포가 아닌 새로운 시작의 의미이며, 또한 그것을 통해 사는 자들이 무엇을 얻고 생각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소나티네〉

이것은 동화와도 같은 야쿠자들(혹은 죽음에 관한)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폭력은 너무나도 뻔뻔한 것이어서 일반적인 생각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조직의 2인자인 무라카와(기따노 다께시)는 흔히 전형적인 야쿠자로 생각되는 인물입니다. 냉혹하고 잔인하고, 그렇지요.

조직의 명령에 따라 오키나와에 문제를 해결하러 간 무라카와는 곧 배신에 직면합니다. 그리고는 고립되지요. 이때부터 무라카와와 그의 부하들은 기묘한 짓들을 하게 됩니다. 폭죽으로 한밤중에 총싸움을 한다거나, 바닷가에서 스모를 도입한 인형 놀이를 한다거나, 함정을 파놓고 빠뜨리기도 합니다.

이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마을에서 야쿠자들(이라고 불린 사람들이)이 하는 짓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느낌을 줍니다. 눈도 깜짝하지 않고 무표정하게 총을 쏘아 대던 녀석들이 아이들이나 하는 짓을 하면서 순수한 모습을 보여준다니..... 경찰이 들으면 웃을 일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야쿠자라는 것을 상기해 본다면 이것은 그리 신기한 것이 아닙니다. 매번 그들에게 반복되는 일상은 쏘고 죽이고 하는 대단히 비인간적이고 몹쓸 짓입니다. 그런 일상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이유야 어쨌든) 그들은 오랜만에 자신들이 하던 일들과 반대되는 지점에 설 수 있었던 것이지요.

바다와 동심으로 돌아간듯한 순수함, 그리고 여인. 이렇듯 평안해 보였던 무라카와의 새로운 일상은 또다른 폭력에 의해 깨지게 됩니다. 그리고 무라카와는 이 때문에 다시 과거 자신이 존재했던 일상으로 되돌아 가지요.

이 영화에서 "죽음"은 〈행복한 장의사〉와 대단히 다릅니다. 숭배나 동경의 대상에 가깝지요. 그리고 죽음이 뿜어내는 본래의 분위기, 즉 공포와 허무함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종말, 그리고 안식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끝내고 새로운 시작의 출발선 앞에 선 무라카와는 그래서 마지막으로 총을 듭니다. 아슬아슬하게 죽음과 삶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자신의 모습이 반복될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혹은 그의 말대로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졌"기 때문일까요?

죽음은 산 자에게는 허무한 것이지만, 반대로 죽은 자 그 자신에게는 평안한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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