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스페셜 - 화요교육] 초등생, 미국 교과서 든 여행가방 끌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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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구 개포동에 사는 주부 임모(40)씨는 요즘 초등 3학년인 딸의 영어학원 숙제를 봐 주느라 하루 3~4시간씩 땀을 흘립니다. 그는 “딸이 영어학원에서 수학·사회·과학까지 영어로 배운다”고 말합니다. 이씨가 올 초부터 딸을 보낸 대치동 I영어학원은 미국 초등학교 교과서를 사용합니다. 1~6학년 교과서가 주로 쓰이는데 한 권에 3만~4만원 하고, 두꺼운 것은 10만원이 넘습니다.

 임씨는 “외국에 거주한 적은 없지만 유아 때부터 일반유치원 대신 ‘영어학원’에 보냈다”며 “영어에 익숙한 아이가 다른 교과도 영어로 배운다면 영어를 더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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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치동 엄마들 사이에 미국 교과서반을 운영하는 영어학원이 인기입니다. I·P·L학원이 ‘빅3’로 손꼽히죠. 학원 앞엔 바퀴가 달린 여행가방을 끌고 다니는 초등생(대부분 3~6년)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미국 교과서 종류가 많다보니 공항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는 여행객처럼 가방을 끌고 다닙니다.

 이 학원들은 엄격한 레벨테스트(진단평가)로 학원생을 관리합니다. 학원 테스트에서 떨어져 울고 웃는 엄마와 초등생이 많습니다. 아까운 점수차로 떨어진 학생들을 위한 재수반도 있습니다. 대치동 A학원 재수반에 딸(초등3)을 보내고 있는 강모(37·잠실동)씨는 “수업시간마다 시험을 보는데 이달까지 점수가 안 나오면 재수반에서도 ‘아웃’된다고 해 걱정”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대치동에 이런 학원이 늘어난 것은 취학 전부터 영어 사교육을 받은 초등학생이 많아진 영향입니다. 미국 교과서를 사용하다 보니 관련 참고서도 쏟아져 나옵니다. 국내 한 출판사가 미국 초등학교에서 많이 쓰이는 주요 교과서의 어휘를 정리해 만든 참고서가 20만 권 이상 팔렸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미국교과서반이 인기 있을까요. 정말로 영어교육 효과가 좋을까요. 미국교과서반을 운영하는 영어학원들은 “한국에 살면서 미국의 초등학교를 다니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합니다. 서경미 인터내셔널 아카데미(IA) 개포점 원장은 “어려서부터 영어를 자연스럽게 익혀 모국어처럼 영어가 익숙한 아이들에겐 새로운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며 “영어동화책만으로 배우기 힘든 다양한 분야를 간접 경험할 수 있어 좋다”고 말합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초등 6학년 학부모 강모(44)씨는 “초등학교부터 차근차근 미국교과서로 공부하면 사회·과학 등 어려운 어휘에 익숙해져 토플(TOEFL) 같은 공인영어시험에도 자연스럽게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미국교과서가 한국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재인지 전문가에게 물어봤습니다. 숙명여대 테솔(TESOL)대학원 강남준 교수는 “아이가 미국교과서를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인데도 영어에 도움이 된다고 공부시키면 다른 과목에 대한 흥미까지 잃는 등 역효과가 난다”고 말했습니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배운 교과 내용과 학원에서 미국교과서로 배운 내용이 다른 데다 영어 어휘 수준이 높기 때문입니다. 서울대 이병민(영어교육과) 교수는 “미국교과서는 사회·정치·경제·역사 등 내용 중심으로 짜여 있고 고학년으로 갈수록 한국 대학생 수준의 어휘로 수준이 뛴다” 고 지적했습니다.

 미국교과서를 사용하는 학원들의 수업 현장을 볼까요. 한 학원은 초등학생들에게 매일 단어 50개 외우기 숙제를 내줍니다. 원어민 교사와 토론수업도 있으나 교과서 내용을 이해하는 독해 위주 수업이 이뤄집니다. 미국교과서는 토론수업을 전제로 만들어진 것인데 학원의 교습법은 주입식이라면 문제겠지요. 강 교수는 “한국어를 할 줄 안다고 누구나 초등교사가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학원강사들이 내용을 얼마나 충실히 전달하는지 의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글=박수련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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