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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왜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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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인식은 곧 문명의 시작이었다. 인간이 파리 목숨처럼 살아서는 안 되고 바람이 불면 납작 엎드리는 풀잎처럼 살아서도 안 되며, 인간이 인간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종처럼 사는 것은 야만이라고 규정한 것이 문명이다. 물론 인간이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오랫동안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여자나 아이들도 온전한 인간이 되기에는 부족한 존재라는 생각도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계몽시대가 도래하면서 인간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에 소중한 존재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았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가 북한의 인권 문제만 나오면 좌우로 갈라져 홍역을 앓는 것은 유감이다. 종북주의자들이 반대하는 건 예상할 수 있다고 해도 진보주의자들까지 반대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미얀마의 인권을 거론하는 데는 이론(異論)이 없는데, 왜 북한의 인권을 거론하면 쟁점이 되는가.

 북한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를 보라. 통치자와 체제에 대해 단 한마디의 비판을 했다는 죄목으로 일생 동안 외부와 차단된 채 짐승처럼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일찍이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옮기는 천형을 받았다고 하는데, 지상의 통치자 비판이 신들을 속인 죄보다 엄중한 죄란 말인가. 그들의 얼굴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21세기 대명천지에 노예처럼 살아가는 그 삶에 대해 우리라도 눈물을 닦아주고 그 아픔과 원통함을 대변해줘야 하지 않을까.

 물론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큰소리로 떠들어 봐야 남북관계도 나빠지고 북한주민들은 더욱더 고통을 받게 된다”고. 그러나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북한 인권에 대해서 침묵한 대가로 얻은 게 무엇인가. 북한 인권이 좋아졌나. 남북관계가 좋아졌나.

 지금은 동물권까지 거론하는 세상이다. 구제역 확산을 막기 위해 수많은 소와 돼지들이 죽어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가슴 아파하는 것은 소·돼지들이 비록 이성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고통은 느낄 수 있는 감수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에게 다짜고짜로 죽음의 고통을 강요하니, 그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하물며 인간이랴. 불의한 제도 아래서 상상을 초월하는 비굴함과 모욕을 강요받으며 흘리는 눈물을 우리는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북한 인권이라고 해서 무슨 사회권이나 복지권과 같은 거창한 권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간이라면 구제역 걸린 소나 돼지처럼 부조리하게 죽어가는 운명과 조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할 뿐이다. 또 그것을 이방인이 아닌 동족의 정으로 호소하고 싶은 것이다.

 북한의 인권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통일의 진정성이나 평화를 위한 슬기로움보다 지성의 비겁함과 동족애의 빈곤을 의미할 뿐이다. 북한의 인권을 외치는 것은 결코 골수 반공주의자가 되어서가 아니라 동족을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민족애의 발로다. 우리가 북한 주민들을 동족의 마음으로 껴안는다면 쌀과 비료를 주는 일 못지않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최소한의 품위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고통이나 눈물은 도덕적 호소력을 지닌다. 깔깔거리며 웃고 있는 어린아이 곁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으나, 울고 있는 어린아이 곁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울음소리에는 우리의 발목을 잡아끄는 도덕적 호소력이 배어 있지 않은가. 지금 북한 주민들이 하늘을 향해 부르짖고 있는 저 소리를 들어보라. 적어도 동족이라면 그 소리 없는 아우성에 응답하는 게 도리일 터다.

 공연히 북한을 자극해서 무엇 하나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물론 공연히 북한을 자극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절박하고 정당한 이유라면 북한을 자극하는 일도 무릅써야 하지 않겠는가. 인권에 대한 호소는 단순히 현실을 모르는 이상주의자의 호소가 아니다. 북한 인권은 상상을 초월하는 최악의 상황인 까닭이다. 우리 인간은 어디의 누구를 막론하고 짐승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가난과 부유함을 떠나, 삶의 옹색함과 넉넉함을 떠나 인간으로서 품위를 존중받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찍이 그리스의 디오게네스는 쓰레기통에서 살았다. 그래도 그에겐 알렉산더 대왕의 다가옴을 거절할 만큼의 품위가 있었다. 지금 절대 빈곤에 허덕이는 북한 주민들에겐 디오게네스의 품위는커녕 한국 사회에서 노숙자 정도의 품위조차 없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들의 부르짖음을 대변해야 할 이유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