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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부활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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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박소영
도쿄 특파원

16년 전 한신(阪神) 대지진 발생 이튿날 나는 재해지역인 효고(兵庫)현 고베(神戸)에 있었다. 그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희생됐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뱀처럼 비틀어진 도심의 고가도로와 잿더미로 변한 주택가, 10층짜리 건물들이 무너져 내린 참상에 몸서리쳐야 했다. 도심을 강타한 직하형 지진이라는 점, 그것도 새벽에 발생했기 때문에 희생자 대부분 집에서 잠을 자다 변을 당했다. 무너진 건물 더미만 치우면 됐기에 사망자 수색이 비교적 수월했다. 피해가 고베지역에 국한돼 지진 발생 후 사방에서 자원봉사자와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할 수 있었다. 1주일간 씻지 못하는 불편함과 여진의 공포와 싸워야 했지만 끼니 걱정은 하지 않았다.

 지난달 동일본 대지진 재해지역으로 출발할 때만 해도 머릿속에 16년 전 고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계산은 센다이(仙臺)의 해안지역 아라하마(荒濱)에 도착하면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건물 한 채, 나무 한 그루 남김없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쓸어버린 쓰나미의 위력 앞에 망연자실했다. 부모들은 초등학교가 있던 자리에서 하루 종일 아이를 찾고 또 찾았다. 그러다 진흙탕이 된 책가방과 구겨진 아이의 작문 공책을 가슴에 품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은 차라리 지옥이었다. 흐트러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침착한 일본인’이라지만 집과 가족이 순식간에 사라진 현실을 어떻게 담담히 받아들이겠는가. 이재민 1000여 명이 몸을 피했던 미야기(宮城) 현청에선 한밤중에도 분노와 슬픔에 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망이 확인된 사람보다 행방불명된 사람이 몇 곱이나 많은 상황. 한신 대지진 직후부터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줬던 구호품과 배식은 1주일이 지나서야 제공됐다. 이번 재난은 어떤 일본인의 말처럼 지진과 쓰나미·원전 사고가 겹친 ‘트리플 재난’이다. 언제까지 방사능 공포에 떨어야 하는지 기약도 없다.

 하지만 두 재난에서 보여준 일본인들의 대응은 한결같았다. 수퍼마켓마다 제한된 물건을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공평하게, 공평하게”를 외치며 조금씩 양보하고 나누는 모습은 일본의 높은 시민의식을 또다시 보여줬다. 일본적십자와 중앙공동모금회가 모은 동일본 대지진 의연금은 3일 1000억 엔(약 1조4000억원)을 넘어섰다. 한신 대지진 후 약 석 달간 모은 의연금에 육박한다. 아키히토(明仁) 일왕 내외가 거처하는 왕궁은 지진 발생 후 자발적인 절전을 시작했다. 도쿄시민들도 수퍼마켓과 백화점에서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 사용을 자제하고, 거리의 네온사인과 실내조명을 최소화함으로써 재해지역민과 고통을 나누고 있다. 자발적인 절전 덕에 지진 후 계속됐던 계획절전은 최근 나흘간 단행되지 않고 있다. 나눔의 결과다. 한신 대지진 때 “나는 다리를 다쳤다”며 내게 자전거를 빌려줬던 70대 할머니가 그랬고, 센다이에서 택시를 잡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나를 차에 태워줬던 노부부가 그랬다. 5년 전 다시 찾은 고베에서는 참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10년 후 일본의 동북지역이 또다시 번영의 땅으로 부활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박소영 도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