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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한복 입힌 채 묻어 조선의 흙이 되게 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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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호 07면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을 연구하고 발굴하는 데 일생을 바친 뒤 한국 땅에 묻힌 일본인 아사카와 다쿠미의 80주년 추모제가 2일 오전 서울 망우리 공원묘역에서 열렸다. 참배객들이 추모제를 마친 뒤 한자리에 모였다. 최정동 기자

만해 한용운, 죽산 조봉암, 소파 방정환 등 한국 근·현대사의 주역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함께 도란도란 이웃해 잠들어 있는 서울 망우리 공원묘역. 그 속에 한 일본인의 묘지가 있다. 달항아리 형상의 조형물이 무덤 옆에 세워져 있는 게 눈길을 끌지만 전체적인 모양새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무덤과 다를 바 없다. 비석엔 이런 문장이 새겨져 있다. “한국의 산과 민예를 사랑하고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다간 일본인, 여기 한국의 흙이 되다.”

한국의 美 발견에 삶을 바친 아사카와 다쿠미

2일 오전 80여 명의 참배객이 모였다. 이날 80주기를 맞은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1891∼1931)의 추모제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한·일 양국의 정치인·문인·학자 등 80여 명이 쓴 글을 모은 추모 문집 한국을 사랑한 어느 일본인의 이야기도 그의 영전에 바쳐졌다. 문집에는 아사카와의 삶을 책으로 읽고 공부한 서울 청담고 학생들의 글도 담겼다.

아사카와는 식민 치하의 조선에 건너와 살던 평범한 일본인이었지만 그의 한국 사랑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그는 40세로 마감한 짧은 인생을 한국의 미(美)를 발견하고 전파하는 데 바쳤다. 그가 심취한 대상은 귀족 취향의 화려한 예술품이 아니라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그릇, 항아리와 소반, 옷장 등 소박한 민예품이었다. 아사카와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본 다도 전문가들이 극찬하는 찻잔도 알고 보면 평범한 조선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그릇 가운데 골라낸 것”이라고 썼다.

조선 항아리를 손에 든 아사카와 다쿠미. 27세 때의 모습이다. [아사카와 형제 기념사업회 제공]

아사카와는 1914년 식민 치하의 조선으로 건너왔다. 먼저 조선으로 건너와 미술교사를 하던 일곱 살 연상의 친형 노리타카(伯敎)로부터 영향을 받아 이뤄진 선택이었다. 서울 청량리에 집을 마련한 그는 한복을 즐겨 입었다. 한국 물품을 한국 사람보다 더 애용했다. 집은 온돌방이었고 방 안에는 한국식 장롱을 두고 살았다. 한국어까지 배워 구사했으니 사람들이 조선인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식민지 조선에 건너와 살던 다른 일본인들은 굳이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국인에게조차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던 때였으니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남긴 일기에 따르면 한복 차림으로 전차를 타고 가다 일본인 승객으로부터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강요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의 민예를 체계화하고 미학의 대상으로 승화시킨 사람으로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야나기를 민예의 세계로 인도한 사람 또한 아사카와 형제였다. 야나기는 아사카와의 집을 방문해 그의 수집품을 감상한 것을 계기로 한국의 민예품에 빠져들었다. 의기투합한 아사카와와 야나기는 사재를 털고 지인들로부터 기부를 받아 1924년 경복궁 안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아사카와는 결혼할 때 어머니가 양복을 사 입으라고 준 돈까지 털어 넣었다. 훗날 어머니가 “양복은 사 입었느냐”고 묻자 “전부 골동품이 되어 버렸어요”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이곳의 컬렉션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아사카와가 남긴 저서 조선의 소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조선의 소반은 순박하고 단정한 자태를 띠면서 우리의 일상생활에 친근한 존재다. 세월과 더불어 우아한 기품이 더해 가는 것은 올바른 공예의 표상이라 할 만하다.” 이는 그의 독특한 예술관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아사카와는 원래 공예품이란 생산자의 손을 떠나 사용자의 손을 거치면서 특유의 아름다움을 발휘하게 된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 아사카와의 눈에는 조선 민중이야말로 조선 민예품의 진정한 완성자였다.

그는 또 조선도자명고란 저서를 남겼다. 형 노리타카와 함께 조선 8도의 가마터를 답사하고 쓴 이 책은 조선 그릇의 정확한 명칭과 용도, 그릇을 빚는 도구와 원료 등을 체계화한 명저로 꼽힌다.
아사카와는 또 당시 광화문 일대의 경관이 조선신사 신축으로 무너지고 광화문이 철거 위기에 몰린 데 대한 반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는 1922년 “아름다운 성벽이 부서지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문은 제거되고 어울리지도 않는 숭상을 강제하는 신사에 거액의 돈을 쓰려는 공무원의 속을 알 수 없다. 일본과 조선 양 민족의 융화를 꾀하기는커녕 앞으로 또 다른 문제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썼다.

아사카와는 예술 분야 외에도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한국의 산림녹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일본에서 농학교를 졸업한 그는 본업이 영림서 공무원이었다. 한국에 와서도 포천에 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기사로 일했다. 그는 자연 상태에서의 흙의 힘을 이용해 소나무 종자를 발아시키는 이른바 ‘노천매장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해 당시 민둥산이 많았던 조선의 산하가 되살아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포천시 광릉의 국립수목원도 아사카와의 손길이 닿은 곳이다. 이런 인연으로 포천시와 아사카와의 고향인 일본 야마나시현 호쿠토(北杜)시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그가 40세의 젊은 나이에 급성 폐렴으로 숨진 것도 육림 활동과 관련이 있다. 조선 각지를 돌며 묘목 기르는 법을 가르치느라 건강을 돌보지 못한 것이다. 그가 숨지자 수많은 조선인이 장례식이 치러진 청량리 일대에 모여 호곡하며 서로 상여를 메겠다고 나섰다. 그의 유해는 한복을 입은 채 서울에 묻혀졌다. ‘조선의 흙이 되고 싶다’던 뜻에 따른 것이었다.

아사카와 80주기 추도 모임을 주최한 조만제 삼균학회 이사장(조소앙 선생의 조카)은 “아사카와의 인류애 넘치는 삶은 한·일 양국 국민 모두에게 감동을 준다”며 “그의 삶을 영화로 만드는 일이 일본에서 추진되고 있다”고 밝혔다. 일·한 의원연맹 부회장인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의원은 추모 문집에서 “아사카와 형제의 인생을 그린 단행본 백자의 사람을 몇 해 전 눈물을 흘리며 정신없이 읽었다”며 “깊은 애정과 신념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삶이 한·일 양국의 새로운 발전과 아시아의 평화로 이어져 나갈 것을 기원한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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