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믿는다고 해도 ‘믿음의 농도’에는 차이가 있다. ‘진짜로 믿는 사람’과 ‘가짜로 믿는 사람’과 ‘미지근하게 믿는 사람’이 있다. 미국 철학자 에릭 호퍼(1902~1983)에 따르면 ‘진짜로 믿는 사람(true believer)’은 한 믿음에서 다른 믿음으로 믿음의 대상이 바뀌어도 뜨겁게 믿는 성향은 바뀌지 않는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18> 바울 『로마서』
바울은 전형적인 ‘진짜로 믿는 사람’이었다. 우리말로 바울로·바오로·파울로스·바우로로도 표기되는 바울은 유대교 신자였을 때에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맹렬히 박해했으나, 예수를 믿게 된 다음에는 스스로 ‘예수의 종’을 자처했다. 그가 예수를 믿기 전에는 예수의 추종자들은 죽이는 게 당연했고 ‘예수의 사도’가 된 다음에는 예수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게 당연했다.
모든 기독 교회들의 성인·사도
바울은 위대하다. 그는 교단·종파를 떠나 기독교 전체가 떠받드는 성인이자 사도다. 가톨릭·정교회·루터교·성공회는 그를 축일로 기념한다. 바울은 기독교 최초의 신학자·사상가다. 신약성서의 3분의 1이 그가 각지에 있는 교회나 인물에게 보낸 서간문이다. 약 20년간 전도자로 활동하며 로마제국의 동부 지역에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2만㎞에 달하는 전도 여행 도중 바울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기독교 전통에 따르면 그는 결국 로마에서 순교했다. 성격이 급하고 고지식하고 불같았던 바울은 인생 후반부를 예수를 위해 살다 간 것이다.
바울은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다 예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한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은 루벤스와 미켈란젤로와 같은 거장들이 그림의 소재로 삼기도 했다. 바울의 ‘이전 이후(before and after)’ 체험에는 전염성이 있다. 그가 지은
바울 신학의 영향으로 전개된 종교개혁과 개신교의 탄생에서 보듯, 바울은 분열과 갈등의 원인 제공자이기도 하다. 현대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기독교 내부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세속 사회 간의 갈등에 불을 지피고 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리스도교 성립을 둘러싼 예수와 바울의 관계는 신학·종교학·사학 분야에서 뜨거운 조명을 받아왔다. 과학 못지않게 이들 학문 분야는 바울과 관련된 ‘전통 신앙’에 적대적이었다. 상당한 지지를 얻은 평가는 바울이 예수와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공동 창시자’이거나 ‘사실상의 창시자’라는 것이다. ‘평범한’ 예언자였던 예수를 ‘신(神)의 아들’로 만든 것은 바울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유대교의 경계를 넘지 않았고 바울이 없었더라면 ‘예수 운동’은 유대교의 군소 종파로 끝났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이에 못지않게 도전적인 주장은 바울이 예수가 전한 복음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1743~1826)은 바울이 “예수의 교리를 최초로 왜곡한 자(the first corrupter of the doctrines of Jesus)”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 의료 활동을 펼치기 전 신학자로 명망을 쌓았던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965년)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폈다. “가능하면 바울은 예수의 가르침을 인용하는 것을 회피한다. 우리가 바울에게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예수가 비유로 가르쳤고 산상설교를 행했으며, 제자들에게 주의 기도문을 가르쳤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일부 학자는 바울이 그노시스 신앙과 플라톤 철학의 신관을 포용해 복음을 오염시켰다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예수가 전한 복음’과 바울이 전한 ‘예수에 대한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 바울이 ‘생전의’ 예수를 만나보지 못했다는 게 지적된다. 일각에서는 복음서 자체가 복음서보다 20~50년 정도 앞서 집필된 바울 서간문의 신학에 맞춰 집필됐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여성 해방론자 바울
기독교와 세속 사회의 싸움에서도 바울이 고정 ‘타깃’이다.
현대 세계에서 모든 종류의 불평등은 단죄된다. 무신론자들과 진보적 신앙인들은 바울의 서간문에 일부 나타난 불평등의 정당화를 맹공한다. 바울은 노예제를 옹호하고 권위에 대한 순종을 강요했으며 남성우월주의자였으며 ‘반유대주의의 아버지’이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바울이 동성연애를 단죄한 것도 도마에 올랐는데 바울 자신이 동성연애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동성연애에 대해 민감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이러한 공격에 반격하는 것은 여러 각도에서 가능하다. 첫째, 바울은 만민의 평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예컨대
기독교 내부 문제에 국한된 논란도 있다. 바로 바울의 서간 중에서도 가장 긴
반목의 본질은 구원에서 율법과 ‘예수에 대한 신앙’이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에 관한 것이었다. 신(神)의 인간 구원 계획에서 예수의 수난·죽음·부활이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의 문제였다. ‘오직 율법’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이 될 이유는 없었다. 문제는 ‘오직 예수’와 ‘예수와 율법’의 갈등이었다. 바울은 죄인인 인간은 누구도 예수에 대한 믿음 없이 신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오직 예수’에 가까운 주장이었다.
바울 자신이 믿음·행실 모두 강조
바울은
개신교와 달리 가톨릭 교회는
바울은 율법이냐 예수냐의 문제에서는 예수를 선택했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과 행실 모두를 강조했으며, 어쩌면 바울은 믿음과 행실 중 하나를 선택해 손을 들어주지 못했다.
1980년대부터 루터교·성공회 등 개신교 일각에서 가톨릭의 입장에 접근하는 ‘바울에 대한 새로운 시각(New Perspective on Paul·NPP)’이 제기됐다. 1세기 유대교-기독교의 문제를 배경으로 하는
한 연구에 따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