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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마비 벼랑 끝에 선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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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경민
뉴욕 특파원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선 매년 연말 ‘종합격투기’가 벌어진다. 예산안 처리 때문이다. 지난해 말에도 어김없었다. 여당의 ‘날치기’에 야당은 ‘공중부양’으로 맞섰다. 그런데 알고 보니 한국은 양반이었다. 미국에선 지난해 10월 1일 시작된 2011회계연도 예산안이 아직도 의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임시변통으로 마련한 땜질예산 시한도 8일로 다가오고 있다. 예산보다 더 큰 고민은 국가부채다. 현재 미국 국가부채는 14조 달러를 훌쩍 넘겼다. 법으로 정한 한도 14조3000억 달러조차 다음 달 중순이면 무너질 판이다. 그 전에 한도를 늘리지 않으면 미국 정부 기능이 마비되는 ‘참사’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여야는 ‘네 탓’ 공방에 여념이 없다. 민주당은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을 탓한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문에 미국이 빚더미에 올라앉았다는 얘기다. 반면 공화당은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을 물고늘어진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퍼주기식 경기부양책이 미국을 빚 수렁에 빠뜨렸다는 거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은 기세 등등하다. 지난 1월 하원은 2011회계연도 예산을 615억 달러나 깎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예산을 한꺼번에 왕창 깎으면 경기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며 버티던 백악관과 민주당은 몸이 달았다. “반 딱 잘라 330억 달러 깎는 선에서 타협하자”며 공화당에 매달리고 있다.

 한데 막상 미 정부 살림살이를 들여다보니 재정 파탄의 뿌리는 훨씬 깊이 박혀 있었다. 노인을 위한 의료보험인 메디케어, 저소등층을 대상으로 한 메디케이드, 실업자·은퇴자에게 주는 사회보장비. 이 세 가지가 미국 정부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0%가 넘었다. 20~30년 전 복지제도를 잘못 설계한 탓이다. 그렇지만 역대 어느 정부도 감히 손대지 못했다. 혜택을 줄이기 어렵다면 세금이라도 올려야 했다. 그러나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세금 올린다는데 춤 출 유권자는 없었다. 그 사이 재정은 속으로 곪았다. 급기야 두 차례 전쟁에 금융위기가 덮치자 터져버렸다. 싫든 좋든 이젠 복지제도 수술이 불가피해졌다. 그 고통은 결국 서민에게 돌아간다. 혜택 받는 숫자가 많은 만큼 삭감 효과도 크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에서도 복지가 새삼 화두(話頭)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 회원국 중 복지 지출 짜기로 한국은 멕시코 바로 다음이다. 이쯤 되면 우리도 경제력에 걸맞은 복지제도를 설계할 때가 됐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도 복지는 ‘뜨거운 감자’가 될 공산이 크다. 그렇지만 표로 복지제도를 설계하는 건 위험천만하다. 앞으로 복지 혜택을 받을 세대는 투표권을 가진 반면 부담을 져야 할 세대는 미성년자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가 가장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사회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공약과 국익 사이에서 고뇌할’ 대통령이 자꾸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정경민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