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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감탄과 감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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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주철환
j TBC 콘텐트 본부장

감탄은 외마디로 새 나오지만 감동은 속 깊이 스며든다. 그 사이로 몇 개의 단어가 출몰한다. 첫 번째는 ‘오죽하면’이다. 나도 저런 상황이 오면 저렇게 할 수밖에 없을까.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다. 다급하고 위급해도 저런 결정은 신중할수록 좋을 텐데.

 3월 한 달 동안 방송가를 달군 핫이슈는 단연 ‘나는 가수다’였다. 기획 단계부터 요란했고 방송 시작 후에도 화제 만발이더니 급기야 4회 만에 대형 사고를 쳤다. PD가 바뀌고 한 달간 휴업한다는 문패도 걸렸다. 속전속결이다.

 화제의 중심에 김영희 PD가 있다. 정확히 이십 년 전 내가 ‘일밤’을 연출할 당시 그는 패기만만한 조연출자였다. PD에게 필요한 ‘3ㅊ’이 창의력, 추진력, 친화력인데 그는 3박자를 고루 갖추었다. 방송계의 거목이 될 거라 예측하는 시선들이 많았고 세월은 그것을 인증했다.

 재주 있는 놈이 재수 있는 놈을 못 당한다는 건 방송계의 잠언이다. 승승장구하던 ‘쌀집 아저씨’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그가 책임을 맡은 ‘일밤’은 몇 해 동안 ‘1박2일’에 맥을 못 추었다. 회심의 승부수가 바로 ‘나는 가수다’였다. 구겨진 자존심을 단번에 회복할 수 있는 마법의 카드.

 포맷은 유행 따라 바뀌어도 예능의 기획 의도는 만고불변이다. 재미와 감동. 재미가 껍질이라면 감동은 알맹이다. 이번엔 서바이벌이라는 당분을 입혔다. 기발한 상상. 저런 가수들을 어떻게 섭외했지? 하지만 여기까진 감동이 아니라 감탄의 영역이다.

 기대감을 가지고 TV 앞에 앉았다. 김건모가 7등 했다는 소문은 비선으로 돌았지만 그래도 확인하고 싶었다. 무대는 경이로웠지만 게임은 경악으로 치달았다. 무대가 링으로 바뀌는 순간 들려오는 맥 빠지는 소리. 재도전. 산악인에겐 참 아름다운 단어지만 그 분위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터져 나온 혼잣말. “욕깨나 먹겠군.”

 방송이 끝나고 바로 ‘일밤’ 홈피에 들어갔다. 분노의 대폭발이었다. PD 실명을 거론하며 사과, 사죄, 사퇴를 요구하는 네티즌의 항거가 거의 시민군을 방불케 했다. ‘느낌표’의 명PD는 졸지에 ‘물음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결과는 의도를 종종 무력화한다. 애당초 가창력을 점수화한다는 게 찜찜했다. 차라리 호소력이라고 살짝 틀어주면 어땠을까. 호소력은 관객의 주관이 작용하므로 세대와 취향에 따라 평가가 갈릴 수 있다. 낮은 점수를 받아도 가수는 감당 내지 당당할 수 있다. 내지르는 기술이 아니라 파고드는 기량이므로 실력보다는 운으로 돌릴 수 있다. 참가 가수와 청중 평가단, 그리고 시청자에게 이런 정황을 미리 고지했다면 20년차 국민가수도 쑥스러운 ‘핑계’를 대지 않았으리라.

 일주일이 지났다. 누군가에겐 가장 뜨거웠고 누군가에겐 몹시 차가웠던 일주일. 한 개의 오락프로를 두고 시청자와 제작진 모두 공부를 많이 한 7일이었다. 한국을 찾은 여배우 미아 패로가 인터뷰에서 남긴 명언이 생각난다. 평생 두 개의 R을 마음의 주춧돌로 삼았는데 그건 바로 존중(Respect)과 책임(Responsibility)이었다. 방송의 미래 역시 그 두 기둥으로 버텨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

주철환 j TBC 콘텐트 본부장(드라마·예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