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구속은 신중하게, 영장 기각은 더 신중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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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유길용
사회부문 기자

구속이 곧 유죄임을 뜻하지는 않는다. 범죄를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수사나 재판을 방해할 우려가 있을 때 신체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교과서 속의 이야기일 뿐이다. 현실 세계에서는 법원이 일단 구속영장을 발부하면 해당 피의자에게 ‘유죄 판단을 받았다’는 낙인이 찍히게 된다.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이 낙인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법원과 검찰이 구속영장 청구나 발부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다.

 법원이 불구속 원칙을 강조하기 시작한 건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2005년부터다. 이 대법원장은 2007년 기자간담회에서 “구속을 (수사기관의) 권한이라고 생각하면 국민과 갈등이 생긴다. 구속은 권한이 아니라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률은 2005년 12.2%에서 25% 안팎까지 높아진 상태다. 인권보장 차원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보인다.

 그러나 ‘증거인멸이나 도주 우려가 없다’는 기각 사유를 만능의 잣대로 쓸 경우 피해자에 대한 보복범행 가능성이나 사안의 중요성 등 사건의 다양한 측면들이 무시될 수 있다. 이러한 우려는 지난달 19일 경기도 수원에서 일어난 살해 미수 사건으로 현실화됐다. 자신이 묵던 고시원에서 여주인과 말다툼을 벌인 뒤 불을 지른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가 영장이 기각된 지 열흘 만에 여주인을 흉기로 찌르고 달아난 것이다. 영장 기각이 피의자에게 추가 범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셈이다.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상황에서 보복범행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아쉽게도 이러한 정황은 영장 발부를 판단하는 데 고려되지 않았다. 지난 17일에는 절도 및 사기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가 영장 기각 열흘 만에 부동산 중개업자를 살해한 사건도 있었다. 전과 9범에 출소한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아 가중처벌이 가능했지만 피해금액(346만원)이 적다는 이유로 풀려났다.

 이에 대해 검찰은 “영장 발부는 신중해야 하지만 기각 역시 신중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법원은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법 원칙을 내세운다. 하지만 사건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없이 영장 발부 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한 명의 범인을 놓치는 바람에 열 사람의 무고한 피해자가 나올 수도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이 대법원장의 말을 빌리자면, 피해자 보호도 법원의 책임이다.

유길용 사회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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