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 리스트] 고물가에 과일시장도 뒤집어졌다 … 값싼 외국산 매출이 국산 첫 추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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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오전 서울 한강로동에 위치한 이마트 용산점 지하 2층 과일 코너. 두 아이의 손을 잡은 주부 신희정(36)씨는 딸기와 방울토마토 매대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방울토마토 1팩(750g)의 가격은 4980원. 할인상품으로 나온 딸기는 1㎏에 8880원. 신씨는 결국 발길을 돌려 수입 과일 코너로 향했다. 신씨가 집어든 것은 미국산 오렌지와 필리핀산 바나나. 어른 주먹만 한 크기의 오렌지가 6개에 5670원, 바나나는 1송이에 3980원이었다. 신씨는 “국산 과일은 값이 비싸 도무지 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아이들에게 과일을 먹이지 않을 수는 없으니 조금이라도 싼 수입 과일을 사게 된다”고 말했다. 

이수기·정선언 기자

29일 서울 성수동에 위치한 이마트 성수점에서 고객들이 칠레산 청포도를 사고 있다. 이상기후로 국산 과일 값이 꾸준히 오르자 이마트는 지난해 11월 칠레 현지에 바이어를 파견해 농장과 직거래를 성사시켰다.

한국인의 식탁에서 수입 과일이 국산 과일을 빠르게 밀어내고 있다. 신세계 이마트가 3월 과일 매출 비중을 분석한 결과 수입 과일의 매출 비중이 국산 과일을 넘어선 것으로 드러났다. 이달 들어 27일까지의 과일 매출액 중 국산 과일이 차지한 비중은 49%, 수입 과일은 51%였다.

 국산 과일과 수입 과일 매출이 역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대형마트도 사정은 비슷하다. 롯데마트의 수입 과일 비중은 1월 14.2%에서 3월엔 37.6%로 치솟았다. 홈플러스도 같은 기간 국산 과일 비중이 75.5%에서 64.5%로 떨어지고 수입 과일 비중은 10%포인트 이상 올라갔다(24.5%→35.5%).

 원인은 복합적이다. 국산 과일 값이 오른 게 첫째다. 국산 과일 출하량이 줄어든 탓이지만 최근 물가오름세 심리 확산도 무관치 않다. 이에 따라 소비자들이 조금이라도 더 싼 외국산 과일을 구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마트 최상록 과일팀장은 “3월 들어서까지 추운 날씨가 계속되는 등 이상기후 때문에 국산 과일 생산량이 줄었다”며 “국내에서 생산되는 과일의 품종과 수량이 적은 3~4월에는 수입 과일 매출 비중이 느는 게 보통이지만 국산 과일과 수입 과일 비중이 역전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4월에는 과일 수입이 최고치를 기록하는 만큼 다음달엔 이 비중이 더 커질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울시 농수산물공사에 따르면 딸기(2㎏)의 최근 일주일 평균 가격은 2만3174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5.4% 올랐다. 방울토마토 역시 5㎏에 2만2232원으로 지난해보다 13.8% 비싸졌다. 딸기와 방울토마토는 3월부터 출하량이 늘어 가격이 떨어지는 과일이다. 하지만 올해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제철 과일이 오히려 과일값 오름세를 주도하고 있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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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이마트 용산점 과일 코너에서 수입 과일은 4000~8000원대의 상품이 주를 이룬 반면에 국산 과일은 가장 저렴한 것들이 6000~7000원 선이었다. 참외는 1봉지(3~8개)에 1만900원이나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수입 과일 매대만 주부들로 북적일 뿐 국산 과일 매대는 한산했다. 이마트 측은 “이달 들어 대표적인 국산 과일인 사과와 귤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각각 4.7%, 15% 줄었다”고 말했다.

 특히 귤의 대체재 정도로 여겨지던 수입 오렌지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마트에서는 오렌지가 딸기를 제치고 3월 과일 최고 매출을 기록했다. 오렌지는 지난달에도 귤보다 많이 팔렸다. 오렌지뿐 아니라 다른 수입 과일도 인기다. 바나나와 수입 포도는 이마트의 3월 과일 매출 순위에서 각각 3위와 5위를 차지했다. 반면 국산 과일은 딸기(2위)와 사과(4위)만 5위권에 올랐다. 롯데마트에서도 오렌지와 바나나가 각각 매출 2, 3위를 차지했다.

 해외에서 들여오는 과일의 품종도 다양해졌다. 수입 과일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돌코리아’가 이달 21일 처음으로 들여온 용과(Dragon Fruit)가 대표적이다. 용과는 베트남에서 재배되는 선인장 과일의 하나다. 돌코리아 관계자는 “새콤하면서 단맛이 강하고 과즙이 풍부해 봄철 과일로 제격”이라며 “국산 과일 값이 올라 수입 과일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과거엔 국내에 수입되지 않던 새로운 과일이 들어올 여지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인기 품목과는 거리가 있는 다른 수입 과일 매출도 큰 폭으로 상승했다. 이마트의 경우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자몽은 107%, 망고는 272% 매출이 늘었다.

 국산 과일 값 상승과 수입 과일 선호는 소피 패턴까지 바꿔놓고 있다. 제철 과일 중심이던 소비 패턴이 할인 품목 위주로 달라진 것이다.

 주부 변숙영(58)씨는 “신문 광고나 전단지 등에서 할인 품목을 미리 확인하고 필요한 걸 할인하는 날 장을 보러 간다. 특히 과일은 초특가 상품으로 나온 것들을 중점적으로 사는 편”이라고 말했다. 대형마트와 기업형수퍼마켓(SSM)들은 초특가 과일 상품들로 소비자들의 발길을 잡아끌고 있다.

  하지만 수입 과일도 가격이 꾸준히 오르고 있어 소비자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다. 오렌지의 경우 주요 산지인 미국 캘리포니아에 비가 자주 내리고, 일조량이 감소하면서 출하량이 지난해 대비 10% 감소했다. 여기에 중국의 소비 증가까지 겹쳐 오렌지 가격은 지난해보다 10% 이상 오를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다.

바나나도 사정은 비슷하다. 필리핀 등지의 생산물량이 줄어든 데다 최근 지진 피해를 본 일본에서 구호식품으로 지정되면서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바나나도 4월 이후엔 공급이 달려 값이 오를 것으로 보인다.

◆유통업체, 저렴한 과일 찾아 해외로=유통업체들은 바이어를 해외 산지에 직접 보내는 등 수입 과일을 싼 값에 들여오기 위해 필사적인 자구책을 추진하고 있다.

 30일까지 특별 기획전이 진행되는 이마트의 칠레산 청포도는 칠레 현지 농장에서 직거래를 통해 들여온 것이다. 이마트는 지난해 11월 바이어를 칠레에 보내 농장 10곳과 직거래 계약을 맺었다. 현지 농장들이 보통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매매 계약을 맺는 것을 사전에 파악해 한 달가량 서두른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대비 40%까지 물량을 더 확보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구매 물량이 늘어나면서 당도 16브릭스(brix), 포도알 굵기는 17.5mm 이상인 상급 제품만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이마트는 수입과일 중 매출이 높은 오렌지·바나나·체리 등에 대해서도 해외 산지와 직거래를 추진하고 있다. 바나나의 경우 기존의 필리핀 산지 외에도 에콰도르 현지 업체인 노보아 측과 직거래를 성사시켰고, 체리는 미국 1위 생산업체인 스테밀트 측과 직거래를 진행하고 있다.

 롯데마트 역시 지난해 6월 바이어를 미국 캘리포니아에 직접 보내 킹오렌지 직수입 계약을 맺었다. 롯데마트에서 판매되는 킹오렌지 2200t 전량은 미국 선퍼시픽사의 농장에서 들여온 것이다. 롯데마트 수입과일 상품기획자(MD) 김석원 과장은 “이상기후로 감귤 등 국산 과일은 물량이 줄고 당도도 떨어져 킹오렌지를 대체 과일로 정하고 직매입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영국의 테스코사가 운영하는 홈플러스는 아시아 테스코 그룹과 공동 구매를 통해 가격을 낮췄다. 호주산 체리와 이란산 석류의 경우 2009년부터 중국·일본·태국·말레이시아의 그룹사와 공동으로 구매하고 있다. 5개국 테스코사에서 취급하는 수입 과일 물량만 연간 7만t에 달한다. 홈플러스 과일팀 이충모 팀장은 “캘리포니아산 킹오렌지를 개당 880원에 판매하는 등 공동구매한 과일은 시중가보다 평균 10%가량 싸게 판다”며 “규모의 경제를 통해 원가비용을 낮췄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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