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의 얼굴'로 브라운관 누비는 송윤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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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탤런트 송윤아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다. 왕에서 거지까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야 하는 배우가 변신하는 거야 당연하지만, 그래도 송윤아처럼 드라마마다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는 배우는 드물다. 탤런트 송윤아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미스터Q〉에서는 주인공을 괴롭히는 얄미운 악녀로, 〈애드버킷〉에서는 이지적이고 당찬 변호사로, 〈종이학〉에서는 세상에 물들었지만 순정을 간직한 밤무대 댄서로, 그리고 〈왕초〉에서는 지고지순의 사랑을 간직한 여인으로 극에서 극을 오가는 이미지 변신을 해왔다. 최근에 시작한 드라마 〈남의 속도 모르고〉에서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처녀로 또 다른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인내. 그녀의 약력을 살피면서 떠오른 또 하나의 단어다. 95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슈퍼탤런트로 연예계에 입문했지만, 98년 드라마 〈미스터Q〉 이전까지 팬들은 그녀의 모습을 기억하지 못한다. 수십 년 무명생활 끝에 뒤늦게 빛을 본 경우도 심심치 않지만, 화려한데뷔 후에 다시 무명의 설움을 겪어야 한다는 건 분명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탤런트 송윤아의 변신과 인내를 가능하게 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하며 그녀를 만나보았다.

▶ 새로 시작한 드라마와 자신이 맡은 '노숙자'에 대해 한마디 하면?

유동근 선배님이 코믹한 백수로, 이미숙 선배님이 짠순이 노처녀로 나오는 코믹 홈드라마예요. 아직 드라마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는 분명치 않아요. 드라마는 많은 부분이 진행되는 중간에 결정이 되거든요. 제가 맡은 노숙자란 인물은, 뭐랄까, 한마디로 부잣집 딸로 자란 철부지죠. 그냥 밝은 여자. 직업은 쇼호스튼데 약간 건망증이 있기도 하구요. 거기다 공주병 증세도 약간 있는데, 다른 남자와는 달리 자기한테 별 관심을 안 보이는 남자와 결국 사랑하게 돼요.

▶ 그럼 지금까지 드라마에서 맡은 역할 중에 가장 평범한 인물이네요. 〈왕초〉의 연지나, 〈애드버킷〉의 여변호사나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은 아니었잖아요.

그런데, 그래서 더 어려워요. 사실 지금까지 맡았던 〈미스터Q〉의 주리나 〈종이학〉의 연희나 〈왕초〉의 연지나 다 자기색깔이 분명한 역할이어서 오히려 더 쉬운 점이 있었어요. 더구나 가벼운 분위기의 홈드라마는 처음 하는 것이어서 어떻게 분위기를 맞춰야 할지 아직도 헷갈려요. 그래서 일단은 오버하지 말자고 마음 먹었죠. 아무래도 코믹드라마를 처음 하니까 분위기에 휩쓸려 자꾸 과장된 연기가 나오는 것 같아서요.

▶ 지금까지 굉장히 독특한 캐릭터들을 맡았어요. 인물의 성격도 〈미스터Q〉의 주리 같은 악녀부터 〈왕초〉의 연지 같은 지고지순한 여인까지 극에서 극을 달리구요. 또 그런 변신이 모두 성공적이라는 평을 받았는데 비결이 뭐예요?

저는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어요. 어디 앞에 나가서 한 마디 얘기도 잘 못했죠. 그런데 연기를 하면서 맡은 역할에 따라 성격이 변하는 게 느껴져요. 주위에서도 그런 말씀들을 하시구요. 어떤 드라마 하나를 시작하게 되면 제가 맡은 인물에 빠져 살면서 완전히 그 성격이 되는 거예요. 〈애드버킷〉의 여변호사 역을 할 때는 말투도 논리적이 되고, 〈왕초〉의 연지였을 때는 말 대신 눈물이 많아지고 하는 식이죠. 이제는 어떤 것이 제 진짜 성격인지 모르겠어요. 이번에 노숙자 역을 맡고 나서는 저도 벌써 공주병에 건망증 환자가 됐는걸요.

▶ 데뷔하고 지금까지 거의 쉬지 않고 드라마를 했는데, 드라마라는 게 하나만 해도 일주일을 몽땅 들여야 하는 작업이잖아요. 거기다 CF도 여러 개 하고. 피곤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전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지금까지 너무 일하는 행복에만 빠져 건강이 좀 나빠졌어요. 얼굴이 상했다는 소리도 가끔 들을 정도죠. 제 자신도 느끼겠어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운동을 시작했어요. 그렇다고 어디 다니면서 운동하는 건 창피해서요, 그냥 집에다 운동기구 사놓고 시간날 때마다 조금씩 하고 있어요.

▶ 만약 당장 한달 동안의 휴가가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여행이오. 그런데 늘 마음뿐이에요. 바쁜 것도 바쁜 거지만 아버지가 보수적이어서 딸 혼자 여행 가는 건 도저히 못 봐주시겠대요. 아버지는 평생 동안 선생님을 하시다 얼마 전 교장선생님을 끝으로 퇴직하셨거든요. 친구들이랑 가는 것도 반대하세요. 그냥 식구들끼리 다 같이 갈 기회가 있다면 그 때 같이 가자고만 말씀하시죠. 제가 초등학생도 아니고 어디 식구들이랑 가는 게 여행 같은 느낌이 나겠어요? 그래도 방송이나 CF촬영을 하면서 며칠씩 집 떠나 있는 게 여행이라면 여행이죠.

▶ CF나 방송 때문에 가본 곳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데는 어디예요?

홍콩이오. 거리나 사람들도 좋았지만, 워낙 무시무시한(?) 경험을 해서 기억에 남아요. 홍콩에는 LG싸이언 광고를 찍으러 갔어요. 원래 홍콩이란 도시는 영화건 CF건 촬영이 금지된 도시래요. 그런데 우리는 홍콩의 거리에서 촬영을 해야 했어요. 그래서 편법을 썼죠. 홍콩의 조직들을 동원한 거예요. 조직의 어깨들이 우리를 위해 거리에다 인간 방어벽(?)을 쌓고 그 안에서 촬영을 했어요. 광고를 보시면 마지막에 사자탈을 들고 얼굴을 보이면서 〈우, 싸이언〉하고 외치는 사람들 있죠? 그 사람들도 조직 사람들이었어요. 홍콩의 조직들은 액션배우로도 활동한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한국에 와서 케이블 TV에서 그 사람들이 조연으로 나오는 홍콩영화를 봤어요. 거기서도 역시 조직으로 나오더라구요.

▶ 처음 탤런트가 된 것이 95년인데, 사람들이 기억하기 시작한 건 98년 드라마 〈미스터Q〉를 통해서였어요. 나름대로 무명시절이었을 텐데… 오히려 화려한 데뷔를 한 사람은 사람들의 무관심을 견디기 힘든 법이죠.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어요?

데뷔하고 3년 동안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어요. 데뷔하고 나서는 〈용의 눈물〉〈사랑〉〈지평선 너머〉같은 작품의 제법 비중있는 역할을 맡았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탤런트 송윤아를 기억해주지 않았어요. 거기다 촬영장에서는 매일같이 감독님한테 혼나는 게 일이었어요. 촬영이 끝나고 집에 오면 펑펑 울었지만, 어디 가서 마음놓고 하소연할 상대도 없었어요. 부모님한테 말씀드렸다가는 당장 그만두라고 하실 게 뻔하고, 탤런트가 되고 나서는 친했던 친구들도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전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친한 연예인이나 선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이왕 시작한 일이니 여기서 그만둘 수 없다는 오기 하나로 버텼죠. 데뷔하고 3년 동안은 옷 한번 산 적이 없어요. 옷 살 돈이 없었어요. 공채를 통해서 탤런트가 되면 2년 동안 방송국 전속이 되는데 한 달에 40만원 받는 게 수입의 전부예요. 그걸로는 옷은 커녕 교통비랑 점심값도 안 나오죠. 그렇다고 부모님께 손을 벌리긴 싫고. 모자라는 돈은 아르바이트로 과외를 해서 충당했어요. 그냥 이 악물고 버틴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삼수 해서 대학에 들어간 경험이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인터뷰가 끝나고 송윤아를 설명해주는 또 하나의 단어가 떠올랐다. 솔직함. 시종일관 진솔하고 거침없는 대답 속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마음이 보였다. 여기에서 어려운 시절을 견디는 힘이 나오고, 천의 얼굴로 변신하는 능력이 나왔구나. 이제 막 시작한 송윤아의 새로운 변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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