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 21일 별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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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고 이희건 명예회장(왼쪽에서 둘째)이 1985년 신한은행 창업 3주년과 본점 이전을 축하하는 리셉션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한은행 창립 주역인 이희건 명예회장이 21일 오후 노환으로 별세했다. 94세.

 이 명예회장은 재일동포들의 금융 기반을 확립해준 재일동포 사회의 대부였다. 한일 양국의 교류를 촉진한 민간 외교관이기도 했다.

 일제 시대 경북 경산군에서 태어난 그는 1932년 열다섯 살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낮엔 단순 노무직으로 일하며 주경야독으로 메이지대 전문부를 졸업했다. 이후 그는 오사카의 무허가 시장에서 자전거 타이어 장사를 하며 돈을 벌기 시작했다. 동포 상인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상점가 동맹을 조직해 30세에 초대 회장이 되기도 했다.

 55년 재일 상공인들과 함께 ‘오사카 흥은’이란 신용조합을 설립하면서 금융인의 길을 걸었다. 당시 오사카 지역엔 재일동포 상인들이 밀집해 있었지만 일본 은행에서는 찬밥 신세였다. 오사카 흥은은 일본 은행들로부터 융자를 받지 못하는 재일동포들에게 돈을 빌려주며 번창했다. 오사카 흥은을 30년 만에 그 지역 최대 신협으로 커갔다. 93년엔 간사이지역 5개 신협을 합병해 ‘간사이흥은’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 명예회장은 77년 국내에 단자회사인 ‘제일투자금융’을 설립했다. 재일동포들이 국내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금융을 지원해주기 위해서였다. 이어 82년 7월 재일동포 340여 명으로부터 출자금으로 모아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그는 고객 만족과 주인정신, 파이팅 정신 등을 평소 강조해왔다. 이게 요즘 신한이 고유한 경영철학으로 내세우는 ‘신한 웨이’의 뿌리가 됐다.

 이 명예회장은 일본한국상공인연합회 부회장, 한국민단 고문, 재일본본국투자협회장 등을 지내며 모국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재일동포의 조국 돕기운동에도 앞장 서왔다. 이런 공로를 인정 받아 70년 국민훈장 무궁화훈장을 받았다. 88년 서울 올림픽 당시엔 재일본 한국인 올림픽후원회장을 맡아 100억 엔을 모아 한국에 기부하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은 23일 신한금융 주주총회장에서 한동우 신한금융지주 회장에 의해 알려졌다. 신한 주주총회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지난주부터 의식을 잃고 일주일 이상 가족의 보살핌을 받다 세상을 떠났다. 유족들은 유지를 받들어 가족만 참석한 채 장례식을 마쳤다. 신한금융은 5월 초 고인의 49재에 맞춰 국내에서 추모식을 거행할 예정이다.

 한동우 회장은 “신한의 역사이자 조국을 사랑한 큰 거목이 졌다”며 “고인의 창업이념을 받들어 신한을 그가 바랐던 그런 금융그룹으로 키우겠다”고 말했다.

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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