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99)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대화 7

말굽: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요컨대 뭐야? 불을 지르지 않았다?
나: 물론. 나는 관음봉 바위틈에서 비박하고 있었어. 불이 난 걸 내려다보고 달려 내려왔을 땐 이미 그애의 집 전체로 불길이 번져 있었고, 소방차는 주차된 차들 때문에 접근도 못하는 상태였어. 한밤중이라 잠자고 있던 그애와 그애 아버지는 그대로 불 속에 있었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 뛰어들어 그애를 업고 나왔고, 그애가 아버지를 부르면서 울부짖는 걸 보고 다시 불 속으로 뛰어 들어갔지. 그애의 아버지를 구하려고. 그게 기억의 끝이야. 위에서 떨어지는 서까래인가 뭔가에 얻어맞고 쓰러진 후 정신을 잃었으니까. 이 화상이 그때 생긴 거야. 화상 치료를 받고 나왔더니 난 이미 방화범이 되어 있었어. 증거는 충분했지. 그애 아버지한테 맞을 때 내가 “불이라도 확 싸질러 버릴 거야!”라고 말한 걸 들었다는 증언자도 나왔고, 기름을 담아간 것으로 보이는 쇠통도 나왔거든. 개의 내장을 담는 데 쓰던 우리 집 쇠통이었지.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 방화범으로 몰린 직접적인 이유는 그날 오후 버스정류장에서의 일이었어. 취조형사는 개백정의 아들 따위에겐 인권이 없다고 소리쳤어. “너 같은 새끼에게 나눠줄 인권은 없어!”라고. 어떤 자는 귀뺨을 치고 어떤 자는 정강이를 차더군. 오가는 형사들이 너나없이 머리통을 내 쥐어박으면서 “새끼 개백정이구나!” 낄낄댔어. 그들이 일러주는 대로 곧 자백하고 말았지. 어차피 살고 싶지도 않았거든. 그 동네와 그 집, 죽어서라도 떠나고 싶었거든.

말굽: 자백했으면, 결과적으로는 불을 지른 거지.
나: 솔직히 억울하다고 생각한 적 없었어. 오히려 감옥이 고마웠지.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았고.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는걸. 실신한 나를 불구덩이 속에서 업고 나온 소방관만 많이 원망했지. 얼굴이 흉하다고, 감옥에서도 날마다 감방 동료들한테 두들겨 맞으며 살았으니까. 사람들은 생긴 게 좀 유별나다거나 피부색깔이 좀 다르다거나 하면 그냥 패고 싶어 해. 심지어 불쌍하게 생겼다고, 착하게 생겼다고 주먹질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 그런데, 여기 샹그리라에 와서 이사장을 만나고, 자잘한 기억까지 나날이 복원되고 하면서, 어느 날 불현듯이, 불이 나던 날 저녁, 그 숲 속에서 누가, 어쩌면 부대장이나 부대장의 똘마니가, 여린을 업고 나오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어. 그냥 느낌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이상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눈빛에 확신이 생긴다는 거야. 숲에 숨어서, 우왕좌왕하며, 여린을 업고 나오는 나를 바라보는 그가, 그 누구의 눈빛이 선연히 보이거든.
말굽: <고개를 저으며> 나는 모르는 일이야.
나: <말굽을 빤히 노려보고> 기억을 좀 더듬어봐.

말굽: 만약 부대장이 불을 질렀다면, 그날 밤 그는 내가 장착된 전투화를 신지 않았던가 봐. 산 속을 뛰어다니면서 불을 지르는 일이라면, 무거운 전투화를 피하는 게 당연하지. <킥킥대면서 웃고 나서> 어쨌든, 나는 그 집이 불타는 걸 본 기억이 없어.
나: 확인한 다음 복수하겠다든가, 뭐 그런 생각은 없어.
말굽: 그렇겠지. 남은 감정이라곤 슬픔뿐이라 했으니까.
나: 맞아. 지문이 없어지듯이, 손가락이 삭아 줄어들 듯이, 감정도 그래. 네가 내 오욕칠정을 먹어치우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머지않아, 온몸이 네 차지가 될 테지. 속도를 조절할 필요는 없네. 마지막 남은 슬픔까지도, 부디 모조리 먹어치워줘. 준비는 이미 되어 있어.
말굽: 왜 나를 자네와 분리해서 말하지, 남이 아닌데?
나: 남이야. 나는 쇳덩어리가 아니라고!
말굽: 남이라고 말하고 싶은 자네 심정은 알아. 남에게 먹혔다고 말해야 마음이 편하겠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거야. 적들은 외부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 분열된 의식 속에 나를 갉아먹는 진짜 적들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이사장한테도 많이 들었을 텐데, 아직도 수준이 그 모양이니 실망이네. 나는 자네이고 자네는 나야. 오욕칠정을 내게 먹혔다면서, 나를 계속 타인 취급하다니 섭섭하군. 나는 자네가 간절히 원해서 자네에게 들어가 집을 지었어. 그 집은 내 집이지만 자네의 집이야. 우리는 한 몸뚱어리라는 걸 받아들여. 합일된 의식이 만병을 고친다는 말, 들었잖아? 이사장한테 더 배워. 명안진사에서, 대체 뭘 배웠누?
나: 네가 나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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