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범 명단 미국에 제공” … 카다피는 CIA 정보원이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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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최고지도자가 미국·영국과 비밀스러운 ‘밀월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영국 일간 더 타임스(The Times)는 “카다피가 미국과 영국에 이슬람 과격 분자들에 대한 정보를 비밀스럽게 제공했다”고 21일 보도했다. 더 타임스는 트리폴리 주재 미 대사관발 외교전문과 정보소식통들을 인용해 “카다피가 급진 수니파 테러리스트 수백 명의 명단을 미 중앙정보국(CIA)과 영국 정보기관에 전달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카다피가 전달한 명단에는 반카다피 세력인 리비안 이슬람 투쟁그룹 조직원도 상당수 포함됐다. 리비안 이슬람 투쟁그룹은 1995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만들어졌다. 리비안 투쟁그룹은 96년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영국의 정보기관 Ml6이 카다피 암살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다. 빈센트 카니스트라로 전 리비아 CIA 지부장은 “카다피는 정적 제거를 위해 9·11 이후 정보에 허덕이던 미국과 영국을 이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카다피와 미·영 정보기관이 일종의 ‘공생 관계’를 형성한 셈이다.

 더 타임스는 CIA와 카다피의 ‘공생’이 팬암 항공기 폭파 사건이 발생한 지 10년이 지난 90년대 후반에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88년 12월 런던 히스로공항을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던 팬암 항공 소속 보잉 747기는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공중 폭발했다. 탑승자 259명 전원 이 사망했다. 탑승자 대부분은 미국인이었다. 미·영 수사당국은 3년에 걸친 수사 끝에 몰타에서 항공사 직원으로 활동하던 리비아 정보요원이 카세트 녹음기에 장착한 폭탄을 터뜨렸다고 발표했다. 더 타임스는 미 국무부가 리비아의 인권 유린 등을 비난하기 시작한 2009년 양측의 공생관계가 끝났다고 보도했다.

한편 연합군의 잇따른 공습에 위협을 느끼고 피신한 카다피에게선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이 오버랩된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부설 국가안보기록보존소가 2005년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도널드 럼즈펠드 전 국방장관은 84년 후세인 전 대통령을 만나 “미국은 이란을 막기 위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이란 견제’라는 공통 분모로 미국과 후세인의 밀월관계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각별한 관계는 91년 걸프전쟁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후세인 전 대통령은 2차 이라크 전쟁이 끝난 2006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강기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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