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명 진두지휘·연 50억 달러 관리 '영업의 달인'

미주중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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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라이프는 미국 재계를 대표하는 포춘500 순위에서 64위에 올라있는 대표적 생명보험사다. 운용자산 2870억달러에 8개국에 진출해 있는 글로벌 기업이다. 전체 직원 수는 1만2000명. 이런 글로벌 기업의 고위직에 한인이 포진해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뉴욕라이프의 LA지사장 케빈 최. 그는 뉴욕라이프의 상위 1% 안에 포함되는 고위직이다. 말이 LA지사지 그는 베벌리힐스 미드윌셔 패서디나 지역 등을 총괄하고 있다.

부모님 보험상품 상담하다 한인 에이전트 권유로 시작
270명 에이전트 진두지휘 연 50억달러 보험금 관리

한인 1.5세로써 당당하게 270여명의 직원을 진두지휘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마주 앉기 무섭게 최 지사장은 '영업의 달인'답게 회사 자랑부터 시작했다.

-회사를 얼마나 사랑하길래 만나자마자 회사 자랑부터 시작하나.

"뉴욕라이프는 주식회사가 아닌 상호회사이다. 주주가 아닌 고객이 기업의 주주가 되는 개념으로 실적에 따라 소유권과 이익이 분배된다. 그러니 고객들을 위한 서비스 향상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회사의 경영철학도 수익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장기투자를 통해 고객의 소중한 돈을 관리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초등학교 3학년이던 지난 1976년 이민 온 그는 다우니 지역에서 성장했다.대학을 졸업한 1987년 시큐리티퍼시픽뱅크(이후 뱅크오브아메리카에 합병)의 본점 론오피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보험업계와의 인연은 우연하게 시작됐다. 부모님의 보험상품 문제로 한 한인 에이전트를 만났다가 그의 권유를 받고 1992년 에퀴터블보험의 LA한인타운 오피스 에이전트로 들어갔다. 한인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던 터라 문화적 충격도 느꼈다고 한다.

-은행원에서 보험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흔치 않다. 어떤 계기라도 있었나.

"은행원으로 일하던 당시 30년 경력의 매니저 연봉이 고작 3만6000달러였다. 아침 7시부터 저녁 6시까지 열심히 일했지만 일한 대가는 물론 비전도 없어 보였다. 뉴욕라이프는 매니저가 영업을 하지 않는 대신 에이전트들에 대한 교육을 통해 역량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윗사람이 나가야 승진할 수 있는 여타 회사들과는 달랐고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보험 5년차이던 1997년 뉴욕라이프로 옮긴 그는 4년만인 2000년 12월 서부지사 발령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다. "나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은 없었다"는 그의 말처럼 열심히 일한 것이 투명한 회사 시스템과 맞아 떨어졌다. 그는 2005년에 서부지사의 2인자가 돼 있었다. 요즘 그의 밑에서 일하는 매니저들은 새벽3시30분에도 이메일이 온다며 툴툴댈 정도다.

"내 현실은 내가 만든다" 두려움 이기려 더욱 노력
작년 신규 실적 70% 늘어 전국 1등급 117개중 5위에

-백인 위주이기 쉬운 전통의 대기업에서 어떻게 그런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나.

"나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잘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사내정치가 아닌 실적과 품성에 따라 정해진 규정대로 승진이 결정되는 회사의 인사관리 시스템 덕도 크다. 회사를 믿고 교육과정과 지시에 충실했으며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두려움도 컸지만 이겨내기 위해 더 노력했다."

2005년 또 한번 선택의 시간이 왔다. 뉴욕 본사 입성, 서부지역 본부장, LA지사장 3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지만 그는 LA지사장을 희망지로 적어냈다.

LA지사에는 230여명의 에이전트가 있고 관리하는 생명보험금은 50억달러가 넘는다. 금융위기와 불경기 속에서도 뉴욕라이프의 매출은 6년 연속 늘었다. LA지사의 경우 작년에만 9000만달러의 신규 보험 가입 실적을 올리며 2009년보다 70% 이상 늘었다. LA지사는 전국 117개 1등급(Tier1) 시장 중에서 5위를 차지한다.

최 지사장은 자신의 연봉을 밝히길 꺼려했다. 하지만 서부지역 본부장에 직보하는 2인자에 해당하는 그의 직급과 LA지사가 차지하는 위치를 감안하면 수백만 달러는 족히 될 것이라는 게 보험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왜 뉴욕 본사에 가지 않았나. 세계적인 기업의 뉴욕 맨해튼 본사 고위 경영진,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 아닌가?

“물론 욕심이 났지만 와이프와 하나뿐인 딸 생각에 LA지사장을 선택했다. 가족보다 일을 더 사랑하는 것 같다는 와이프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 일을 시작했던 LA로 돌아와 자라나는 후배들에게 큰 힘이 되고 싶은 마음도 컸다. 여전히 바쁘게 일하지만 이전보다는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 만족스럽다.”

-스스로 생각하는 성공 비결은 무언가. 그냥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건 아닐텐데.

“현실에 굴하지 않고 큰 꿈을 꾸며 스스로를 믿으려 노력했다. 승리자의 태도라고 할까. 살다보면 말만 앞서기 쉽지 않나? 현실에 부딪히며 자신이 처음 세운 기준을 낮추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항상 배우는 자세로 임하며 내 현실은 내가 만든다고 믿고 일했다. 스스로에 한계를 지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최 지사장은 스스로 편안하다 느끼는 자리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살아왔다고 한다. 고무줄을 팽팽하게 당기는 마음으로 살고, 그 고무줄이 시간이 지나 느슨해지면 더욱 당겨서 다시 팽팽하게 만들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도전정신이라고 할까.

“뉴욕라이프에 입사한 1997년만 해도 한인 에이전트는 10명 정도였고, 한인 담당 부서도 없었다. 지금은 70명이 넘는 한인 에이전트가 있다. 이들이 관리하는 생명보험 가운데 20억달러 정도가 한인 고객들의 것이다. 이건 결국 한인사회의 자산이 되고 커뮤니티 발전의 기반이 돼 줄 것이라 믿는다.”

현재 가장 큰 문제인 일본 대지진과 한인사회의 성금 모금 활동이 한창이다. 그러고 보니 뉴욕라이프는 지난 1992년 LA폭동 때 한인사회에 50만달러를 기부했다.

케빈 최 지사장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지난 1976년 가족이민으로 도미 LA 인근 다우니 지역에서 자랐다. 캘스테이트 롱비치 대학에서 재무학(Finance)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한 1987년 시큐리티퍼시픽뱅크(이후 뱅크오브아메리카에 합병)의 LA다운타운 본점에 론오피서로 입사했다. 이후 1992년 보험업에 뛰어들었고 1997년 뉴욕라이프로 자리를 옮겼다. 가족으로는 부인과 고등학생인 딸을 두고 있다.

염승은 기자 rayeom@koreadaily.com
사진=신현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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