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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남윤호의 시시각각

힘내라 도호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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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남윤호
경제선임기자

일본의 도호쿠(東北), 단순히 동북쪽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아픔과 그늘이 드리워진 지명이다. 이번 대지진 탓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그래 왔다.

 굴절은 중세에서 시작된다. 센다이(仙臺)의 영주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의 좌절이 그거다. ‘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만 못할 게 뭐냐’며 야심을 불태웠던 그였다. 그러나 군사력의 격차를 넘지 못하고 굴복해야 했다. 그래도 뒤집기를 시도했다. 서양의 힘을 빌려서다. 그는 1613년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支倉常長)를 로마에 파견했다. 하세쿠라는 산 후안 바우티스타호라는 서양 범선을 건조해 180명의 부하를 이끌고 멕시코·스페인을 거쳐 로마에 도착했다. 거기서 교황 파울루스5세를 알현했다. 명분은 서양과의 교역 확대였다. 단, 그 뒤엔 교황의 승인을 받은 일본 유일의 합법정권이 돼 보려는 다테의 계산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1620년 하세쿠라가 돌아왔을 땐 이미 일본에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다테는 로마와의 접촉 자체를 발설할 수가 없었다. 하세쿠라 사절단은 역사에 묻혔다. 다테 역시 지방영주 신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하세쿠라가 출항한 곳이 지금의 미야기(宮城)현 이시노마키(石卷)다. 얼마 전 쓰나미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됐다.

 18세기엔 대기근(1782~88)이 덮쳤다. 일본 역사상 최악인 ‘덴메이(天明) 대기근’이다. 화산 폭발로 인한 이상기후 탓이었다. 도호쿠에서 최대 30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한다. 인구비례로 가장 피해가 컸던 곳이 하치노헤(八戶). 인구 6만5000명 가운데 절반이 아사했다. 그 하치노헤를 이번엔 쓰나미가 덮쳤다.

 비극은 근세에도 이어졌다. 메이지(明治)유신 때 도호쿠의 영주들은 군사 동맹을 맺고 신정부군과 싸웠다. 도호쿠를 전화로 몰아넣은 1868~69년의 보신(戊辰)전쟁이다. 특히 비참했던 게 아이즈(会津)전투였다. 당시 백호대(白虎隊)라는 소년 의용군 20명이 주군의 패배를 비통해하며 자결했다.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에 감동해 1928년 기념 조형물을 보내 오기도 했다. 그 아이즈가 지금 지진·쓰나미에 이어 방사능 공포에 떨고 있는 후쿠시마(福島)현이다.

 전쟁 후 정권을 장악한 조슈(長州·지금의 야먀구치현)인들은 도호쿠를 조적(朝敵), 즉 역적의 땅으로 찍었다. 세금과 농지 정책으로 가혹한 수탈을 했다. 또 국민화합 차원에서 내전 전몰자를 추모하는 야스쿠니 신사를 만들면서 도호쿠인은 쏙 뺐다. 의도적인 차별이었다. 그 앙금은 아직도 지역감정으로 남아 있다. 영화에서 가끔 나오듯 후쿠시마와 야마구치 출신 처녀총각의 결혼에 장벽이 되기도 한다.

 1950~60년대 도호쿠는 경제성장을 떠받친 저임 노동력 공급지였다. 최북단 아오모리(靑森)에서 출발해 도쿄 우에노(上野)역에 도착하는 열차는 도호쿠 청년들을 가득 실어 날랐다. 이게 ‘집단취직열차’다. 64년엔 이를 소재로 가수 이자와 하치로(井澤八郞)가 ‘아아, 우에노역’을 불러 대히트했다. 도호쿠 출신 서민의 애환을 담은 전설적인 노래다.

 개발 속도는 느렸다. 도로망도 단순하다. 고속도로 한 곳이 막히면 전체 물류가 멈춘다. 지금이 딱 그렇다. 신칸센도 82년 이와테(岩手)현 모리오카(盛岡)까지만 뚫렸다. 그것도 이 지역 거물 정치인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郎) 덕분이었다. 그 오자와의 힘도 예전만은 못한 듯하다. 도호쿠 북단의 아오모리에까지 신칸센이 들어간 건 지난해 말이었다.

 도호쿠는 지금도 저소득 지역이다. 주민소득 랭킹에서 도호쿠의 현들은 밑에서부터 세는 게 빠르다. 그래서 도호쿠는 오키나와(沖繩)·홋카이도(北海道)와 함께 ‘점보기의 꼬리’로 불린다. 일본 경제가 뜰 때는 가장 늦게 뜨고, 가라앉을 때는 가장 먼저 바닥에 닿는다는 뜻이다.

 이처럼 도호쿠는 아픔이 많은 땅이다. 대지진은 그 아픔을 더 키웠다. ‘힘내라 일본’보다 ‘힘내라 도호쿠’라는 격려가 더 절실한 이유다.

남윤호 경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