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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언젠가 쪼개질 것…내가 보호하겠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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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호 30면

이달 초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는 이탈리아 시계·보석 명품 브랜드 불가리를 인수했다. 불가리 지분 51%와 LVMH 지분 3.5%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성사된 37억 유로(약 5조8000억원) 규모의 대형 거래였다. 베르나르 아르노 LVMH 회장은 불가리의 기업 가치에 약 60%의 프리미엄을 얹어줬다. 지난 20여 년간 LVMH가 성사시킨 기업 인수합병(M&A) 중 가장 비싼 거래다.

아르노의 LVMH, 불가리 다음은 에르메스?

1884년 설립된 불가리는 스위스의 리치몬트 그룹(까르띠에, 반 클리프 아펠, 피아제 등 보유)과 티파니를 잇는 세계 3위의 시계·보석 명품 그룹이었다. 불가리 인수는 LVMH의 시계·보석 부문 매출을 두 배 이상 키워줄 것으로 전망된다. 태그호이어·쇼메·위블로 등을 보유하고 있는 LVMH의 지난해 이 부문 매출은 약 10억 유로였다. 전체 매출의 5%에도 못 미쳤다.

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왼쪽)과 에르메스의 파트리크 토마 회장.

아르노 회장에게 불가리 인수는 단순히 그룹의 취약 부문을 강화하는 것 외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해 말 에르메스 경영권을 놓고 에르메스 가문과 지분 전쟁을 벌인 그는 일단 몸을 낮춘 상황이다. 하지만 이번 인수를 통해 그는 최고의 기업 사냥꾼의 면모를 다시 확인시켰다. 장기전에 강하고 집요한 그가 에르메스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본격적인 인수전은 이제부터라는 신호탄일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10월 아르노 회장이 에르메스 지분을 몰래 매집해 17.1%까지 보유율을 늘린 게 알려졌다. 그의 은밀한 작업에 놀란 에르메스 가문은 가족 주주가 보유한 73%의 지분중 50%를 투자해 지주회사를 설립하기로 했다. 아르노 회장은 “에르메스를 인수하려고 지분을 확보하지는 않았다”고 강조했지만 현재 그의 지분율은 20.21%까지 높아졌다. 에르메스 측은 아르노 회장의 적대적 인수 작전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창업자인 티에리 에르메스의 5대손인 베르트랑 퓌에크는 “남의 정원을 밀고 들어온 침입자”라고 비난했다. 파트리크 토마 회장은 심지어 ‘성폭행’이란 표현까지 썼다.

에르메스의 시가총액은 약 26조원, LVMH는 86조원이 넘는다. 에르메스는 덩치에서 크게 밀리지만, LVMH를 무시한다. LVMH가 명품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990년 아르노 회장이 LVMH를 차지한 이래 명품 대중화가 시작됐다. 그는 광고 물량을 쏟아붓고 상대적으로 저렴한 액세서리 등을 만들어 사람들이 명품에 보다 쉽게 접근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인의 40%가 루이뷔통 제품을 갖고 있다고 할 정도가 됐다. 이에 자극받은 다른 명품 브랜드들도 같은 방식으로 고객층을 넓혔다. 하지만 에르메스는 여전히 고고하다.

토마 회장은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그냥 에르메스가 아니라 에르메스 파리”라고 말했다. “에르메스의 제품 85%는 프랑스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최고의 품질을 생산할 수 있는 곳, 예를 들면 시계는 스위스에서 만든다”는 얘기다. 그는 “세상엔 두 종류의 명품이 있다”고도 했다. “엄청난 마케팅으로 겉은 번지르르하지만 내면의 빛이 없는 것과 사용할수록 그 빛이 우러나는 진정한 명품이 있다”는 것이다.

적시하지 않았지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단박에 드러난다. 지난해 루이뷔통은 영국에서 핸드백과 지갑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는 광고를 중단했다. 루이뷔통이 명품이라는 걸 누구도 부정하지는 않지만, 루이뷔통의 많은 제품이 기계를 이용한 조립공정을 통해 제작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철학은 독창성과 장인 정신에 있다”는 에르메스가 루이뷔통 등 LVMH 제품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뻔하다. 그런데 이들에게 인수당할 뻔했으니 보통 불쾌한 게 아니다.

아르노 회장은 “(지분 인수를 통해) 에르메스를 통제하겠다는 것도, 이사회 자리를 욕심내는 것도 아니다”고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르노 회장이 에르메스를 지켜보고만 있을 리는 없다고 본다. 그 역시 “여섯 세대가 이어지면서 에르메스 지분은 무려 70명이 넘는 후손이 나눠 갖게 됐다. 언젠가는 그들이 지분을 팔 때가 올 것”이라며 “누군가 에르메스의 지분을 사들이는 걸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속내를 드러냈다. “그런 식으로 에르메스의 정신이 변하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이렇게까지 아르노 회장이 에르메스를 탐내는 건 누구나 명품을 들고다니는 시대에 에르메스는 ‘최후의 명품’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미 아르노 회장은 디올·펜디·셀린느·지방시 등 60여 개 브랜드를 갖고 있지만 에르메스를 손에 넣을 때 진정한 명품 그룹이 완성된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세계적인 인지도를 가지면서 뛰어난 품질의 제품을 생 산하는 브랜드는 거의 남지 않았다”며 “에르메스는 명품업계의 보석 같은 회사”라고 평가했다.

아르노 회장이 자신의 포트폴리오에 추가할 수 있는 브랜드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도 에르메스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이미 명품업계 판도는 LVMH·리치몬트·PPR 그룹의 3자 구도로 짜여 있다. 시계·보석 부문에서 압도적인 브랜드들이 리치몬트 그룹에, 구찌·이브생로랑·보테가베네타 등이 PPR 그룹에 속해 있는 상황에서 LVMH가 새로 사들일 수 있는 브랜드는 별로 없다. 불가리 인수 이후 버버리나 티파니·토즈 등이 다음 매물로 거론되고는 있지만, 이들은 명품 업계의 진정한 승리자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브랜드들은 아니다. 에르메스에 견줄 만큼 강력한 샤넬이나 최고 인지도를 가진 아르마니 정도가 아르노 회장의 성에 차겠지만 100% 창업주 소유인 아르마니나 베르하이머 집안이 완전 소유한 샤넬은 천하의 아르노 회장에게도 난공불락이다. 이러나저러나 에르메스를 가져와야만 하는 상황인 것이다.

토마 회장은 “우리와 LVMH는 문화 자체가 다르다”며 “(인수될 경우) 우리의 정체성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아르노 회장은 “당연히 에르메스의 문화는 다르고 그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맞불을 놓았다. “프로스트와 스탕달, 다른 스타일의 문학을 즐기는 것처럼 LVMH 안에서 각자를 인정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라고 불리는 아르노 회장은 딱 한 번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1999년 이른바 ‘구찌 전쟁’에서다. 그는 이때도 구찌 지분을 몰래 매집했지만 PPR 그룹의 프랑수아 피노 회장에게 뒤통수를 맞았다. FT는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야 마는 아르노 회장이 결국 에르메스도 손에 넣고 말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고 전했다. 하지만 에르메스의 방어도 만만치 않다. 이달 초 열린 기자회견에서 토마 회장은 “주식시장에서 상장 폐지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LVMH와 에르메스의 길고도 치열한 전쟁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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