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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de Shot] 부서지고 불타도 … 폐허 가로지르는 희망의 행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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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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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본 대지진 엿새째인 16일 미야기현 게센누마(氣仙沼). 땅 위의 모든 것들은 죄다 시커멓게 그을리고 뒤틀린 채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인적이 끊긴 도시는 죽은 짐승처럼 정적에 휩싸였다. 이곳이 며칠 전만 해도 사람이 살던 곳이었다고 누가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몸서리쳐지는 절망감에 차라리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폐허 위에 눈발이 흩날리더니 잠시 뒤에는 을씨년스러운 비가 내렸다. 차가운 비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 선 나약한 인간의 실체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미야기현 북동부 끝, 태평양을 끼고 있는 도시 게센누마는 어업이 활발한 곳이었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원양어업 기지로 어판장에는 참치·가다랑어·꽁치·상어지느러미 등 수산물이 철따라 넘쳐났다. 그러나 이제 항구를 분주하게 드나들던 크고 작은 어선과 부지런한 어부들의 힘찬 목소리는 사라졌다. 동일본을 송두리째 뒤흔든 규모 9.0의 강진은 진원지에서 불과 95㎞ 떨어진 게센누마의 운명을 참혹하게 바꿔놓았다. 지난 11일 오후 항구에 정박해 있던 어선용 연료 탱크가 거대한 지진해일(쓰나미) 앞에 힘없이 전복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연료 탱크에서 유출된 기름은 바다로 흘러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이 기름에 불이 붙었다. 밤새 공포에 떨었던 주민 곤노 히로시(72)는 "엄청난 쓰나미가 밀려와 집을 삼켰다. 불이 난 곳으로 떠내려온 배 안의 기름이 폭발했고, 이런 폭발이 나흘간 계속됐다”고 증언했다. 화염은 몰아닥친 지진해일을 타고 도시 전체로 번져나갔다. 인구 7만5000여 명이 사는 도시가 불바다로 변한 것이다.

 당국은 피해 지역이 워낙 광범위할 뿐 아니라 현장 접근이 불가능해 진화에 나서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일본 정부는 육상자위대를 급파했다. 그러나 화재진압에 나선 자위대 헬기조차 게센누마 상공을 맴돌 뿐 속수무책으로 불타고 있는 도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현지 언론은 “최악의 경우 도시 전체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나흘 밤낮으로 도시의 모든 것을 불살랐던 화염은 잦아들었지만 남은 것은 폐허와 정적뿐이었다. 인적 끊긴 마을 여기저기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차가운 비를 맞으며 구조대가 도착한 것은 닷새가 지난 16일이었다. 어디에선가 살아 있을 생명을 찾기 위한 것이다. 불행이 연이어 닥친다 해도 반드시 극복할 의지와 힘도 함께 온다. 대재앙 앞에서 인간은 초라하다. 그러나 결코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은 위대하다. 폐허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게센누마와 만선의 깃발을 올리며 항구로 돌아오는 어부들의 힘센 목소리를 듣고 싶다.

일본 게센누마
사진·글=김태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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