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연간 사업비 43조 → 30조 … 주택공급 축소 불가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2면

화장을 곱게 했으니 러브콜을 해달라. 16일 국토해양부가 내놓은 ‘한국토지주택공사(LH) 구하기’ 작전계획의 요지다. LH가 위중한 상태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이다. 부채 규모가 125조9000억원에 부채비율은 559%에 이른다. 정부가 뒷배를 봐주는데도 시장에서는 떼일까봐 채권을 안 사줄 정도다. 돈이 없다 보니 지난해에도 43조원으로 잡았던 사업을 다 못하고 26조원어치만 소화했다. 올해는 아예 규모를 30조원 수준으로 줄였다. 이 중 17조원을 빌려야 하는데 6조원가량은 어려울 것 같다는 게 정부 판단이다.

LH는 당초 국민주택기금에서 빌린 돈 30조원을 아예 이자를 낼 필요 없는 “자본금으로 바꿔달라(출자전환)”고 요구했다. 정부가 해야 할 임대주택 사업을 하다 발생한 손실이니 정부가 책임지라는 얘기다. LH는 50만 채의 임대주택을 건설·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생긴 부채만 30조원이다. LH 관계자는 “택지 조성과 건축 비용을 분양을 통해 회수해야 하는데 임대주택은 분양할 수 없어 손실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보금자리주택·세종시 건설 등에서 손실이 생기면 정부가 보전해 주는 방안이 마련됐다. LH는 주요 국책사업을 어려움 없이 벌일 수 있게 됐지만 138곳의 사업장 구조조정도 본격화해야 한다. 사진은 내년 입주를 앞두고 한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세종시 첫마을 아파트. [중앙포토]<사진크게보기>


 그러나 정부는 LH에 직접 돈을 주거나 빚을 탕감해 주는 일은 피했다. 대신 시장에서 채권을 팔 수 있도록 신용을 보강해주기로 했다. 주택기금 차입금도 출자전환 대신 후순위채로 바꿔주는데 그쳤다. 후순위채는 늦게 빚을 갚아도 된다. 금융사에 진 빚을 주택기금 것보다 먼저 갚아줄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셈이다. 그만큼 금융사로선 떼일 우려가 줄어 LH가 발행하는 채권을 사주기 쉽다. 미매각 부동산을 판매목적회사(SPV)에 넘기는 것도 비슷한 취지다. 결국 팔려야 돈이 들어오지만 그래도 장부에서 악성 재고를 떨어내는 효과가 있다.

 보다 장기적으로는 LH가 할 일을 줄여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주거환경개선사업이나 지방 산업단지 조성 사업에서 손을 떼게 하는 식이다. 이를 통해 매년 43조~45조원에 이르던 사업 규모를 30조원 수준으로 줄이기로 했다. 신도시를 만들 때 녹지율을 줄이고, 학교부지 제공 의무도 없애는 방안이 추진된다. LH 입장에선 더 많은 땅을 팔 수 있어 수익률이 올라가고 비용은 줄어들게 된다.

 택지개발과 보금자리주택 사업에 민간이 참여할 길도 터주기로 했다. 사업 초기에 돈이 왕창 들어가지만 회수는 나중에 해야 하는 구조적 문제를 줄이기 위해 민간 돈을 끌어들이겠다는 복안이다. 특히 보금자리주택의 경우 민간건설업체가 중형(60~85㎡)의 분양 아파트를 짓게 하고 국민주택기금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토부 김채규 토지정책과장은 “ 구체적인 참여 방안은 보금자리사업단에서 상반기 중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LH가 중병을 앓고 있다는 것을 다 아는 마당에 화장만 고쳤다고 시장이 러브콜을 보낼지는 의문이다. 신한투자금융 길기모 연구위원은 “55조원에 이르는 회사채 규모 자체가 너무 커 기관투자가들이 선뜻 손이 나가기 어려운 상황”이라며 “유상증자를 통해 부채비율을 떨어뜨리고 재원 조달 방안도 다양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지원책 상당수가 법 개정 사안이라는 점도 부담이다. 국회에서 논란이 일 것이 불 보듯 뻔하다. 특히 보금자리주택 건설에 민간 건설사를 참여시키는 방안은 화약고나 다름없다. 지금도 그린벨트를 헐어 지은 아파트를 분양하는 것에 대해 논란이 심하다. 그나마 서민들에게 싼값에 좋은 아파트를 공급한다는 논리가 있어 반발을 무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간 건설사를 끌어들여 이익을 챙겨준다면 그린벨트 훼손의 정당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정창수 국토부 1차관은 “LH와 같은 수준에서 아파트 가격을 관리하기 때문에 이윤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리수까지 둬가며 지원책을 내놨지만 주택 공급 축소는 불가피할 전망이다. 연간 추진 사업비를 30조원으로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보금자리주택의 경우 2012년까지 32만 가구를 공급해야 하지만 30조원의 사업 규모로는 연간 8만 가구 이상 사업승인을 받기 어렵다. 국토부 측은 어떻게 해서든 보금자리주택 공급 목표를 채운다는 방침이지만, 그럴수록 다른 사업은 축소될 수밖에 없다.

최현철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