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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잔한 기타와 가슴을 두드리는 드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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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호 02면

왼쪽부터 조 월시(기타·키보드), 돈 펠더(기타), 글렌 프라이(기타·키보드), 랜디 마이즈너(베이스), 돈 헨리(드럼)다. 5집 앨범 ‘Hotel California’(1976년) LP판 속에 동봉된 사진. 15일 내한 공연엔 돈 펠더와 랜디 마이즈너는 없다. 대신 베이스 주자는 티머시 B. 슈미트가 온다.

꼭 40년 전이다. LA에서 푸드덕 날아오른 독수리(Eagles)가 있었다. 미국의 심볼인 흰머리 독수리쯤 되리라. 처음엔 넷이었다(지금 밴드도 4명이지만 남아있는 1971년 오리지널 멤버는 둘뿐이다). 흔히 그 독수리는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와 ‘데스퍼라도(Desperado)’라는 두 개의 날개로 난다. 적어도 이 땅의 창공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호텔 캘리포니아’ 기타 서주엔 들판을 가로질러 코끝을 간질이는 삽상한 미풍이 느껴진다. 이내 배틀이라도 벌이듯 주거니받거니 불타오르는 트윈 기타 앙상블의 치명적 유혹도 있다. ‘데스퍼라도’는 또 어떤가. 서부시대 총잡이의 불 뿜는 화약 내음 대신 매캐한 세월의 흙먼지 내음이 흩날린다. 그건 황량함이라기보다 애잔함에 가깝다. 그런데 두 곡으로는 허전하다. 그 눈부신 비상(飛翔), 대충 뭉뚱그리기엔 비상(非常)한 명연주가 수두룩해서다.

박진열 기자의 음악과 음락 사이- 이글스 4집 앨범 ‘One Of These Nights’ (1975년)

이글스 음악을 관통하는 짜릿함은 뭘까. 캘리포니아산 오렌지를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상큼한 과즙 같은 하모니, 하지만 약간 씁쓰레해서 여운이 남는 뒷맛이랄까. 컨트리 록 특유의 푸근한 어쿠스틱 사운드. 약간은 하드하게 내뿜는 로큰롤마저 감미롭다. 당대 미국 서해안 록 음악의 아이콘, 역시 달라도 뭔가 다르다. 이글스는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앨범을 세상에 들려줬다. 그런데도 이 팀이라면 꼭 연주해야 할 것만큼은 농밀하고도 멋들어지게 들려줬지, 나는 생각한다.
컨트리 록·포크 록 같은 장르는 사실 굉장히 미국적 뉘앙스로 가득한 음악 동네다.

15일 내한 공연 멤버들. 왼쪽부터 티머시 B. 슈미트, 글렌 프라이, 돈 헨리, 조 월시.

그런데도 유독 이글스에게만큼은 쏟아지는 박수가 좀 후한 편인 듯하다.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 영(Crosby, Stills, Nash & Young), 포코(Poco·이글스의 베이스 주자 둘 다 포코 출신) 같은 쟁쟁한 동시대 밴드들 역시 좋긴 매한가지인데 말이다. 곰곰 다시 생각해본다. 이글스 멤버 중 초기 기타 플레이어인 버니 리든(Bernie Leadon·64) 말마따나 포크, 컨트리, 로큰롤 같은 60년대 음악의 정수를 이리저리 맛있게 블렌딩한 덕분은 아닐까.

이렇듯 이글스 사운드의 결정체 속엔 LA를 베이스캠프 삼은 웨스트 코스트 록 밴드의 전통이 잔뜩 스며 있다. 더 버즈(The Byrds), 더 플라잉 버리토 브러더스(The Flying Burrito Brothers) 같은 밴드들의 앨범, 언제 꺼내 들어도 나는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들이야말로 이글스 음악이 비롯된 ‘자궁’과도 같은 밴드이므로.

이글스에는 원래 리드 보컬이 따로 없다. 대개 곡을 지은 사람이 직접 맡으니까. 주로 앞장서 노래하는 글렌 프라이(Glenn Frey·기타·63)한테선 사시사철 여유로움이 묻어난다. 그가 리드 보컬로 나선 넘버들, 이를테면 ‘Take It Easy’ ‘Tequila Sunrise’ ‘New Kid In Town’ 등등엔 언제나 구김살 없는 자유로운 어떤 광채가 반짝인다. 이국풍 정서마저 풍기는 달콤한 소리결까지. ‘Lyin’ Eyes’처럼 다소 밋밋한 선율조차 그가 노래하면 꿈꾸는 듯한 기분이 들곤 한다.

그에 비하면 돈 헨리(Don Henley·드럼·64)의 까칠까칠한 허스키 목청에서는 ‘이거 너무 진지한 거 아니야’ 하는 느낌이 든 적도 있다. 삶의 신산(辛酸)스러운 온갖 고비, 죄다 맛본 사람 같았으니까. 드럼을 두들기며 예의 그 고뇌에 찬 표정으로 뱉어내는 가창(‘Hotel California’)이라니. 해서 이 두 사람은 보컬로 치면 이글스의 빛과 그림자쯤 되겠다. 물론 좋은 의미로.
그건 그렇고 짚고 넘어가고 싶은 출생의 비밀(?)이랄까, 아이러니가 있다. 이글스 역대 멤버 중 정작 캘리포니아주 출신은 딱 한 명이다. 은근히 끈적끈적한 노래 ‘I Can’t Tell You Why’ 그 나지막한 목소리의 주인공인 티머시 B. 슈미트(Timothy B. Schmit·베이스·64)뿐이다. 나머지는 다들 어찌어찌 타향으로 모여든 당대의 전형적 히피들이다. 낭만이랄까, 풍류랄까 그런 게 몸에 깊숙이 밴 뮤지션들이다.

그렇다고 대책 없는 낭만성으로만 뭉친 건 또 아니다. 극기, 금욕 같은 정신까지 설핏 내비쳐서다(그때는 더 이상 ‘꿈과 이상’의 연대기인 1960년대가 아니었다. 무기력과 환멸의 70년대다. 이글스 나름의 시대 정신을 탐색한 건 아니었을까. 가령 환멸 따위를 다독거려줄 환상-, 뭐 이런 것 말이다).

다소 얼토당토않겠지만 이글스한테선 어쩐지 ‘극기복례(克己復禮)한 히피’ 냄새가 나곤 했다(언젠가 다들 말쑥한 용모로 바뀌는 바람에 그 매력의 3할쯤은 사그라졌지만). 허튼 욕망, 삿된 마음일랑 웬만하면 꾹꾹 누르고 유유자적 정진한 듯해서다. 시대성을 자각한 것까진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다 어느덧 고고한 경지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고 만다. 그게 바로 ‘호텔 캘리포니아’는 아닐는지.

그렇지만 암만 그래도 한 번 히피는 영원한 히피다. 알 듯 모를 듯한 그 노랫말에서 언뜻 약물 냄새, 슬쩍 풍긴다. 그 가사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여태 말들이 많지만. 어쨌든 약간의 그 퇴폐미조차도 발랄함이 느껴져 듣는 보람이 있다. 라틴, 레게 리듬까지 곁들이며 ‘아메리칸 드림은 그저 신기루일뿐이라네’ 식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것만 같다.

사실 이글스라면 무슨 앨범을 꺼내 귀 기울여도 흐뭇하다. 그중 제일은 네 번째 음반 ‘One Of These Nights’(75년·사진)다. 여기엔 모두 아홉 곡이 새겨져 있다. 그중 제일은 바로 ‘Lyin’ Eyes’다. 글렌 프라이가 흥얼흥얼거린다. 깊은 맛이 우러나는 물기 어린 목소리로 뭉근하게. 버니 리든은 이글스에서의 마지막 기타 연주여서인지 더욱 수더분하게 최선을 다해 거드는 느낌이다.

또 있다. 랜디 마이즈너(Randy Meisner·베이스·65)의 열창이 가슴을 헤집곤 하는 ‘Take It To The Limit’는 뜨거운 기쁨이다(이 노래를 들을 때면 이 곡을 공연에서 들려준 ‘들국화’가 스르륵 떠오른다. 85년의 끄트머리, 스산하던 어느 오후 종로 파고다극장 무대에서 나는 보았다. 검정 교복차림 전인권의 또 다른 절창을, 잡초 같은 영혼의 순수를).

이 음반이라면 새 기타 플레이어 돈 펠더(Don Felder·64)한테도 찬사의 일부를 돌려야 마땅하다. ‘Visions’ 곡에서 뽐낸 그 빈틈 없는 핑거링, 과연 돈 펠더이기에.다 좋은데 이글스의 앨범 재킷 디자인만큼은 절대로 내놓고 칭찬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민망한 일이지만 몇몇 음반 표지는 어째 영 젬병이니까. 하긴 겉만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밴드들보다야 백 번 낫긴 하지만.

음악의 물기가 어디론가 사라져 감성마저 꾸덕꾸덕 말라버린 시대-. 이제나저제나 오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이글스가 온단다. 첫 내한 공연, 드디어 내일모레(15일)다. 천하의 조 월시(Joe Walsh·기타·64)가 그 쫀득쫀득한 맛의 핑거링을 뽐낸다지 뭔가. 제임스 갱(James Gang) 밴드 시절의 명연 ‘Walk Away’부터 그의 기타 솜씨에 마음을 뺏긴 팬이라면 더더욱 두근거리겠다. 고백컨대 12현 더블넥 기타가 썩 잘 어울리는 돈 펠더, 그가 빠진 라인업의 ‘호텔 캘리포니아’는 자못 아쉽다. 해서 이 곡은 언플러그드 버전으로 들려줄는지도 모르겠다.

그럼 또 어떠랴. 자그마치 40년을 벼려 온 사운드, 40년을 기다려온 추억여행인데. 부디 다들 넥타이 푸시고 겅중겅중 옛추억 속으로 뛰어들어 보시길. 목청이 좀 쉬고 두 손바닥이 얼얼해질 쯤이면…, 그 설렘만으로도 행복하다.


정규 음반을 왜 앨범이라고 할까. LP판을 왜 레코드라고 할까. 추억의 ‘사진첩’이고,‘기록’이기에 그런 거라 박진열 편집기자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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