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약에 굶주린 아프리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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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환자는 아프리카에 제일 많다. 에이즈 병원균인 HIV에 감염된 아프리카인은 2천2백만, 전세계 감염자의 3분의 2로 추정된다.

에이즈의 근본적 치료법은 아직도 개발되어 있지 않지만 어느정도 효과를 가진 약물이나 증세를 완화시키는 약물은 여러가지 나와 있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는 이 약품의 1%밖에 소비되지 않고 있다. 약값이 대부분 나라의 소득수준에 비해 너무 비싸고 의료보험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3백만 인구의 14%가 HIV감염자로 파악돼 있는 나이로비의 큰 병원에서는 에이즈환자가 약품을 구해 오지 않으면 입원도 받지 않는다. 병원에 약품을 구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가난한 환자들에게 효과있는 약품이 있다는 말도 못해 준다. 괴로움만 더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정이 WTO(세계무역기구)
에 가입하면서 더 악화되었다는 점에서 미국과 WTO에 대한 원성이 높다. WTO 이전에는 더러 싼 약을 구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17달러짜리 미국제 플루코나졸 대신 2달러짜리 인도산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해적판 약을 만들거나 쓰는 나라는 무역제재
의 위협을 받는다.

특허권을 보호하는 WTO규정에도 예외조항이 있기는 하다. 국민보건에 중대한 위기가 닥친 나라에서는 적정선의 로열티를 주고 약품을 생산해 쓸 수 있게 하는 '강제 라이센스' 규정이다.

그러나 미국같은 강대국 앞에서는 이 예외규정도 그림의 떡에 그치기 십상이다. 작년에 태국은 ddI란 약품의 생산계획을 세우고 미국과 협상을 벌였지만 미국측이 태국 상품의 수입규제를 위협하자 물러서고 말았다.

인구의 10%가 감염자인 남아프리카는 이를 악물고 약품생산을 위한 입법조치를 취했다. 미국 통상부는 즉각 남아프리카를 무역제재의 예비조치에 해당하는 '301조 감시목록'에 올렸다. 미국의 시민단체들이 격렬히 항의하는 바람에 고어 부통령이 나서서 세 달 전 이 조치를 취소했다.

약품 하나 개발에 몇억달러씩 드는데, 그 특허권이 보호받지 못한다면 약품개발 자체가 막히고 말 것이라는 제약회사측 주장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환자의 절대다수가 약품의 혜택에서 제외된다면 약품개발의 보람을 어디서 찾는다는 말인가. 마진을 줄이더라도 판매량을 늘임으로써 이익이 보장되도록 강제 라이센스 규정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고 시민단체들은 주장한다.

약품과 의술조차 자본시장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이다. 에이즈의 획기적 치료법이 국내에서 개발돼 동물실험까지 성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있다.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것도 자랑스럽지만, 이 치료법이 실용화된 뒤 온 세상 환자들에게 두루 혜택을 주게 된다면 더욱 자랑스러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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