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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89)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단식, 개안수련 13

이과장은 꽁지머리를, 원장은 M자머리를 가리킨다는 걸 알아차린 것은 잠시 후였다. 목소리는 당당했으나 키 작은 남자의 눈빛은 흐릿했다. 나를 보고 있는 것도 같고 어딘가 먼, 다른 우주를 보고 있는 것도 같은 눈빛이었다. M자머리는 주방 옆방의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빠져나온 눈알이 보였다. 키 작은 남자는 위로 올라가 침대의 양끝을 밟고 선 채 쇠망치를 높이 들어 올렸다가 M자머리의 정수리를 오지게 내려친 모양이었다. 정수리가 완전히 내려앉아 있었다. 한두 번은 빗맞았는지, 전두골(前頭骨)만은 반 토막이 나서 한쪽은 앞으로 뻗쳐 나왔고 한쪽은 함몰되어 있었다. 술 냄새가 섞였기 때문인지, 썩어가는 듯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누군가 인기척이라도 느꼈는지, 문을 열고 나오는 기척이 복도 반대편 끝에서 났다.

“아무 일 없어요. 들어가서 자요!”
키 작은 남자가 사뭇 우렁찬 어조로 명령했다.
나는 그도 전사가 됐다는 걸 알아차렸다. M자머리가 정말 그의 머리를 ‘삼천 번’이나 때렸다면, 꽁지머리는 그의 머리를 구천 번은 때렸을 것이었다. 그에게 말굽이 생겼다고 해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복도로 나서려던 그림자가 그의 당당한 명령에 찔끔, 안으로 들어갔다. M자머리가 술에 취해 잠들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키 작은 전사는 벌써 잠긴 현관문을 열어젖뜨리고 있었다.
“그믐달이에요…….”
“……쉬고 싶지 않아요?”

키 작은 전사의 말에 내가 사이를 두었다가 대꾸했다.
눈이 얼어붙은 길은 때마침 얼굴을 구름 밖으로 드러낸 달빛 때문에 교교한 흰빛이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조차 알 수 없었다. 남자가 뚱딴지 같은 나의 질문에 뒤를 돌아다보다가 쿡 하고 실없이 웃었다. 천진한 웃음이었다.
개는 짖지 않았다.
키 작은 남자는 경쾌하게 앞장 서 걷고 나는 출산을 앞둔 소처럼 뒤처져 걸었다. 남자의 발소리가 정좌(正坐)한 풍경 속으로 깊이깊이 자맥질해 들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뒷모습이 낯설었다. 막 보고 난 얼굴인데도, 얼굴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다.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몸이 무거웠다. 말굽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숲은 겨울의 끝에 밀려와 단단한 성에처럼 응결되어 있었다.
“……붙잡지 마세요. 어른들, 다 쉬러 가시는 거예요.”
그런 소리가 들렸다. 나를 태우고 온 택시운전사가 나를 위로하기 위해 했던 말이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봄철의 숲은 선과 악에 대하여 어떤 현자보다 많은 걸 가르쳐준다’던 코쟁이 시인의 시구도 들렸다. 봄의 판결은 어쨌든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조금 기울어졌다. 우주 너머로부터 어떤 파장이 수천의 화살로 날아와 내 온몸을 촘촘히 꿰는 느낌이 들었다. 살아온 것만큼, 적막했다.

단식 8일째, 3일 동안의 보식이 시작됐다.
미소보살이 끓인 멀건 오곡죽을 나와 애기보살이 함께 날랐다. 수련자들은 마시는 듯 죽 그릇을 비웠다. “다음에는 나도 개안수련 할 거예요.” 애기보살이 소곤거렸다. 힘이 있는 사람들은 죽을 먹고 나서 주지스님을 따라 명안진사 경내를 서너 바퀴 돌았다. 앉은 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동공(動功)을 대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氣)를 가장 빨리 느끼는 곳은 주먹을 쥐었을 때, 가운뎃손가락 끝이 닿는 손바닥 가운데, 노궁혈(勞宮穴)이라 했다. 말굽이 들어와 집을 짓고 제 방으로 삼은 곳이었다. 주지스님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손바닥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땀이 나는 것은 손바닥 가운데의 노궁혈이 심장의 가장 예민한 촉수이기 때문이라 했다. “손바닥에서 나는 땀은 그러니까 마음(心)의 진액이라 할 수 있어요.”라고 주지스님은 덧붙였다. “부처님이 왜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서로 맞대고 있는지 아세요?” 스님은 계속 물었다. 수련자들은 명안진각 앞에서 주지스님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수련자들 뒤에 서서 손바닥을 가만히 펴보았다.
손가락이 눈에 띄게 짧아져 있었다. 적어도 한 마디 이상 달아난 것 같았다. 지문도 이제 흔적뿐이었다. 게다가 말굽이 단단한 굳은살처럼 되어 검붉은 빛깔로 도드라져 있었다. 나는 누가 볼세라 얼른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말굽의 형상이 살 속으로 완전히 숨어들어가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자신의 강력해진 지배력을 확신한 말굽은, 아마 더욱더 뻔뻔해지기로 작정을 한 것 같았다. “엄지는 폐경(肺經)이고 가운뎃손가락과 손바닥은 심장이에요. 폐경과 심장이 의지하면 마음이 안정되기 때문이지요.” 주지스님이 설명했다. 호주머니에 들어간 나의 가운뎃손가락이 노궁혈에 닿아 있었다. 도드라져 솟아난 말굽이 만져졌다. 말굽은 나의 심장을 점령하고 있었으며, 나의 인격까지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제 말굽은 더 이상 무기물이 아니었다.

나는 심지어 말굽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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