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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넘어, 국경 넘어 공부하는 두 사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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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초등학교 졸업 후 학업을 접었던 소녀는 마흔 넷 중년이 돼서야 고교 졸업장을 받았다. 강냉이밥과 옥수수죽으로 배를 채우는 현실이 싫어 국경을 넘었던 열일곱살 탈북 소녀는 한국에 온 지 4년 만에 대학생이 됐다. 이들의 가장 큰 소원은 “마음 놓고 공부 한번 제대로 해 보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학업을 중단했던 김미숙(가운데)씨가 마흔넷 대학 신입생이 됐다. 20세 이상 어린 동기들과 캠퍼스를 거니는 것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황정옥 기자]

공부할 돈 마련하기 위해 하루 14시간 일했다

김미숙(44·삼육대 상담심리학과 1)씨는 전남 해남 계곡서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다. 소작농이던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교 5학년 때 결핵 판정을 받았고, 정신지체장애가 있던 어머니는 생계를 책임질 수 없었다. 방 한 칸짜리 초가집에서 여섯 식구가 칼잠을 잤다. 13세가 되던 해 가난이 싫었던 그는 서울에 살던 이모를 따라 무작정 상경했다.

이모네 형편도 넉넉하진 않았다. 김씨는 동대문 평화시장 미싱공장에 잡부로 취직했다. 20여 명의 여공과 먹고 자며 미싱일을 배웠다. 한 달 용돈 5000원으로 버티며 차곡차곡 돈을 모았다. “돈을 모아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그 꿈도 잠시,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병원비 등 빚을 갚느라 그동안 모은 돈 전부를 고향집에 보내야 했다. 그리고 5년여가 지났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엔 아직 공부에 대한 ‘한’이 서려 있었다. “19세 때 『데미안』이란 책을 읽었어요. ‘새가 날기 위해선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구절을 보면서 ‘알에 갇힌 새가 내 모습 같다’고 느꼈죠.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2세. 또래들이 화장을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러 다닐 때 그는 모아둔 돈으로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했다. 오전 5시20분부터 8시30분까지 새벽반을 듣고 공장으로 향했다. 영어 단어장을 만들어 미싱 앞에 붙여두고 시간 날 때마다 외웠다. 주경야독에 체력이 달려 미싱 앞에서 쓰러진 것도 수 차례나 된다. 그는 1990년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97년엔 대입 검정고시 문턱도 넘어섰다.

그리고 10여 년이 또 흘렀다. 두 아이를 키우고, 학습지 판매사원으로 일하느라 정신 없이 살아온 김씨는 ‘제대로 학교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8년 학력인정 주부학교인 일성여고의 문을 두드렸다. 고교 입학 후 김씨는 오전 8시면 두 아이(초6·고1)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3년 동안 단 한번도 결석한 적이 없다. 하교 후엔 오후 7시 저녁식사 때까지 자녀들과 함께 앉아 그날 배운 부분을 복습했고, 시험 때면 오전 3시부터 일어나 공부에 몰입했다. 전 학년 내신평균 1.7등급. 수시 일반전형(학생부 80%+면접 20%)으로 대학 신입생이 됐다.

“상담심리를 공부해 가정형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내 이웃들을 돕고 싶어요. 공부하는 데 나이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왕 시작한 공부, 석사 아니 박사과정까지 도전할 겁니다.”

고향 함경북도 회령에 양로원 짓는 날 꿈꾸며

“학교 가서 공부하고 싶었어요. ‘남들은 마음 놓고 공부하는데, 나는 왜 이래야 되나’ 울기도 많이 울었죠.”

새터민 장윤미(22·숭실대 사회복지학부 1)씨는 “2002년 인민학교(북한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기껏해야 1년에 3개월 정도 학교에 나갔다”고 했다. 노동일 때문이었다. 어머니(44)가 1999년 국경을 넘어 중국으로 사라진 뒤 장씨 가족은 ‘반동분자 집안’으로 낙인 찍혔고, 거주지였던 함경북도 회령에서 함경남도 허천군으로 추방됐다. 폐결핵에 걸린 아버지에게 할당된 농장일은 고스란히 장씨와 장씨의 언니·여동생의 몫이었다.

2006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장씨는 탈북을 결심했다. “제겐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어요. 북한에서 교사가 되려면 교원대를 가야 하는데, 출신성분 때문에 불가능했죠. ‘북한을 탈출하면 공부는 실컷 할 수 있겠지’하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2006년 여름 홀로 두만강을 건넜다.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2007년 9월 한국에 들어온 뒤 그는 한 맺혔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하나원에서 2개월간 한국 적응훈련을 한 뒤 지난해까지 수녀원에서 살았어요. 검정고시 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첫날의 설렘을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아무 걱정 없이 책만 볼 수 있다는 게 행복했고, ‘뭔가를 해낼 수 있다’는 희망이 보였다. 오전 9시부터 시작하는 수업시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해 그날 배울 부분을 예습했다. 오후 1시30분 수업이 끝난 뒤 수녀원으로 돌아와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오후 3시부터 5시간을 공부시간으로 할애했다. 오후 10시부터 새벽 잠자리에 들 때까지 국어교과서를 소리 내 읽으며 표준어 공부에 매달렸다. 노력은 성과로 돌아왔다. 2008년 8월엔 고입 검정고시, 2009년 4월엔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새터민으로 매달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았고, 수녀원에서 거주하며 많은 걸 받았잖아요. 저도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었어요.”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엔 수능 공부에 매진하며 주말마다 독거노인을 찾아 수발을 들었다. 그러면서 ‘사회복지사’란 꿈이 생겼다. 지난해엔 하루 2시간씩 자며 대입 준비를 하다 대학별 고사 10일 전 폐결핵에 걸려 6개월간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힘들었던 북한 생활을 떠올렸어요.”

그리고 시작한 또 한 번의 도전. 결국 그는 2011학번 새내기 대학생이 됐다. “대학교 4학년 때까지 사회복지사와 관련한 모든 자격증을 딸 거예요. 외롭게 사시는 독거노인 분들의 딸 노릇을 하고 싶습니다. 통일이 되면 제 고향 회령 오산덕에 노인들을 위한 양로원을 지을 거예요.” (※장씨는 사진 촬영에는 응하지 않았다.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까 걱정돼서다.)

글=최석호 기자
사진=황정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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