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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 늘면 중재시장 커져, 한국에 엄청난 기회 열려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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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난 닐 캐플런은 “중재 허브가 되려면 경쟁력 있는 중재 인력을 많이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용철 기자

중재(仲裁·Arbitration)는 독특한 특징이 있다. 법원의 재판이 아닌데도 중재 판정은 분쟁 당사자 간에 법원의 확정 판결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대부분 소송에 비해 시간도 훨씬 적게 걸린다. 중재 분위기도 비교적 자유로워 호텔방에서 진행되기도 한다. 또 재판은 대체로 공개되는 데 반해 중재 과정은 거의 비공개다.

이런 이점 때문에 각국의 대기업 간, 또는 기업과 상대편 국가 간 다툼이 중재로 해결되는 사례가 많다. 현대오일뱅크 경영권을 둘러싼 현대중공업과 아랍에미리트(UAE)의 아부다비국영석유투자회사(IPIC) 간의 분쟁은 주식매수 대금만 2조5000억원에 달했는데 국제중재를 거쳐 정리됐다.

국제중재 시장은 현재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로펌들이 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지난 3~4일 이틀간 서울에서는 ‘국제변호사협회(IBA) 국제중재회의’가 열렸다. 전 세계 중재 전문가 500여 명이 참여해 다국적 분쟁의 중재와 관련된 법률, 관행과 절차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귀한 자리였다. 아시아를 대표하는 중재 전문가인 닐 캐플런(69)을 3일 대회 장소인 서울 신라호텔에서 만나 중재의 세계에 대해 들어봤다.

“중재는 민간 영역의 판결”
-중재는 다소 낯선 개념이다. 쉽게 설명해달라.
“중재는 재판과 달리 당사자 간에 합의를 바탕으로 이뤄진다. 계약을 할 때 분쟁이 생기면 중재로 해결한다는 조항을 넣어야 한다. 중재를 택하는 이유는 서로 상대편 국가의 재판정에 서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중재가 인기 있는 이유는 법원 판결보다 중재 판정이 집행하기 더 쉽기 때문이다. 2009년 현재 140여 개국이 가입한 뉴욕협약(외국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에 관한 유엔협약)에 따라 중재 판정이 국제적으로 승인되고 집행되고 있다. 그래서 중재는 민간영역의 판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당사자들이 중재 판정은 거부하는 경우는 없나.
“중재지와 중재인을 분쟁 당사자들이 합의에 의해 결정한다. 또 당사자들의 충분한 소명을 들어 판정을 내리게 된다. 대부분은 판정을 받아들이고 집행한다. 물론 극소수의 경우는 판정에 불복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뉴욕협약이 있기 때문에 중재 판정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다.”

-중재는 얼마나 걸리나.
“사건마다 다르다. 건설이나 정유 분쟁은 최소한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내용이 많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물론 몇 시간, 며칠, 몇 주에 끝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11년 전에 중재인으로 임명됐는데 지난 6월에야 첫 심리가 있었던 경우도 있다.”

-중재인은 어떤 자격이 필요한가.
“중재인이 되기 전에 많은 경력을 쌓아야 한다. 여러 방법이 있는데 먼저 판사 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고, 분쟁 해결에 대한 학위를 받은 뒤 관련 업계에서 종사하다가 중재인이 되기도 한다. 다수가 변호사이지만 엔지니어·회계사·교수들도 제법 있다. 첫 번째 중재 사건을 맡기가 꽤 힘들지만 몇 개를 맡고 난 다음에는 쉬워진다.”

-중재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우연이었다. 1978년 영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고 있는데 동료 중 한 명이 공인중재인협회(Chartered Institute of Arbitrators)에 가입하라고 권유했다. 그래서 회원이 됐고 약 1년 뒤 홍콩으로 가서 홍콩국제중재센터 설립에 참여하게 됐다. 처음 국제중재를 맡은 건 86년으로 서울 신라호텔에서 진행했다. 아마도 그게 한국에서 이뤄진 최초의 국제중재였을 것 같다.”

-담당했던 중재 사건 중 대표 사례를 꼽는다면.
“중재는 건설·에너지·석유·지적재산권·인수합병(M&A)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이뤄진다. 홍콩 신공항 관련 중재를 담당했고, 현대중공업과 IPIC 간 분쟁의 중재도 내가 맡았다.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중재 건을 담당한 바 있다.”

-극비로 진행되는 중재도 있나.
“그렇다. 중재를 하는 이유는 워낙 민감하고 보안과 관련된 사안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에 공개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이런 호텔에서 비밀리에 중재를 하기도 한다.”

-국제중재 시장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향후 전망은.
“무역이 성장하면 중재시장도 성장한다. 특히 80년대 초반 이후 아시아 지역의 무역규모가 커지면서 분쟁도 많아졌고 곳곳에서 중재센터를 세웠다. 한국에서는 대한상사중재원(KCAB)의 활동이 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중재시장이 급속히 커지고 있다. 중국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CIETAC)는 매년 5000건의 신규 중재를 다루고 있다. 국제적으로 가장 유명한 파리의 국제상공회의소(ICC)는 지난해 800~900건을 맡았다.”

-아시아 중재시장은 어느 나라가 앞서가나.
“중국이 자본 수출국이 되면서 다른 나라를 상대로 제기하는 중재 사건이 많이 늘고 있다. 과거와 상황이 역전된 것이다. 인도와 싱가포르, 홍콩도 중재의 주요 거점이다. 홍콩은 특히 중국과 관련된 중재가 많다. 중국은 중국 현지에서 중재를 진행하는 걸 선호하지만 여의치 않으면 홍콩에서 한다. 그런데 일본은 좀 수수께끼다. 중재가 활발하지 않다.”

중재 허브 되려면 홍콩과 경쟁해야
-중재시장에서 한국의 잠재력은.
“한국엔 엄청난 기회가 열려 있다고 본다. 법률적 기반이 좋고 한국의 법원도 중재 판정에 대해 적극적으로 보호를 해준다. 몇 년 전 중재 판정에 불복해 제기된 소송이 대법원까지 올라간 적이 있지만 대법원이 결국 중재 판정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다. 중재가 활성화되려면 법원의 지지가 필수적이다. 한국은 국제 경험이 풍부한 법률 인력이 많다. 또 법도 국제 추세에 맞춰 잘 업데이트되고 있다.”

-한국이 아시아의 중재 허브로 자리 잡을 가능성은.
“장기적으로 보면 한국이 중국과 일본 간의 중재센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아시아의 허브가 되려면 홍콩이 강력한 경쟁 상대가 될 것이다. 중재지를 어디로 할지는 협상의 대상이다. 많은 경우 중국은 강한 협상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중국 내에서 중재를 진행할 것으로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또 중재 강국이 되려면 분쟁당사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중재 인력도 많이 확보해야 한다. 중재인의 자격 제한도 없어야 한다. 꼭 법률을 전공해야 할 필요는 없다. 홍콩은 80년대 이
같은 규제를 풀었다.”

닐 캐플런은 ‘아시아 중재의 아버지’로도 불린다. 영국 런던대학 킹스칼리지에서 법학을 전공한 캐플런은 91년부터 2004년까지 홍콩국제중재센터의 회장을 역임했다. 90년부터 94년 말까지는 홍콩 대법원 판사도 지냈다. 홍콩은 물론 세계 중재의 중심지인 런던에서도 지명도가 높다. 99년부터 2000년까지 런던에 자리한 공인중재인협회 회장도 맡았다. 이 협회는 전 세계적으로 회원이 1만2000여 명에 달하는 중재 관련 최대 조직 중 하나다.

수백 건의 굵직한 중재사건을 담당한 캐플런은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았다. 또 영국 왕실의 고문변호사(QC)이기도 하다. 그는 인터뷰 당일 장소가 여의치 않자 자신이 묵는 방을 선뜻 제공하는 소탈함을 보였다. 또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질문에 답할 때는 차분하면서도 젊은이 못지않은 또박또박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강갑생 기자 kksk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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