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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86)

중앙일보

입력

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단식, 개안수련 10

나는 한달 반 전에 죽은 노과장과, 160여 년 전에 죽은 낯선 이름 워즈워스와 함께, 봄을 맞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렸을 땐 내 곁에 아무도 없었다. 고절(孤絶)했다. 나는 마치 오래전부터 계획해두었던 어떤 성스런 작업을 하려고 준비하듯이, 검은 등산복을 재빨리 입고 헤드랜턴 따위를 챙겨 넣은 배낭을 단단히 둘러멨다. 눈만 내놓고 얼굴 전체에 둘러쓰는 발라클라바도 주머니에 넣었다. 발라클라바는 바람 찬 겨울등반에서 둘러쓰는 일종의 두건이었다. 산으로 가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발걸음은 산으로 향하지 않았다.
샹그리라에서 비탈길을 내려오자 택시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밤은 깊었고, 날씨는 낮과 달리 섬뜩했다. 나는 잠시 가로에 멈춰 섰다. 언젠가 여린을 택시 태워 보냈던 지점이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샹그리라를 바라보았다. 샹그리라의 상층부는 어둠 속에서도 의연했다. 그녀의 방은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러나 이른 저녁에 나의 모든 뼈들을 일으켜 세우던 그녀의 손길은 내 몸 골짜기마다 지문처럼 생생히 찍혀 있었다. “맞아!”라고 나는 중얼거렸다. “내가 바로 불구덩이 속에서 널 업고 나온 그 오빠야. 나는 살아 있어!” 나는 살아 있었다. 눈을 깜박깜박해보았다. 살아서 장엄한 끝을 보게 될 거라는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난 왜 산으로 가지 않고 여기로 내려왔을까.
나는 가로에 선 채 생각했다. 방을 나올 때는 산으로 가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은 차들이 달려가고 있는 관음동 가로였다. 왜 산을 등지고 난데없이 거리로 내려왔는지 알자면, 생각이라고 생각한 생각보다 더 밑바닥 생각으로 내려갈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더딘 인간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한 박자 늦게 깨닫는 습관이 있었다. 비로소 생각의 문간을 지나 생각보다 더 낮은 생각의 밑바닥에 닿았다.
“참, 그렇지!”
나는 내 머리를 두어 번 두들겼다.

생각이라고 생각한 생각보다 더 밑바닥 생각으로, 애당초 내가 가고 싶었으며 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산이 아니었다. 봄이 턱 밑에 다가와 있었다. 아주 밑바닥 생각에서 만난 모티브는 그것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 라고 나는 생각했던 것이었다. 봄이 오기 전에 필연적으로 해야 할 어떤 소명이 나를 불러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키 작은 남자가 ‘살려주세요’라고 휘갈겨 쓴 쪽지가 내 손에 만져졌다. ‘봄철의 숲은 어떤 현자보다 선과 악에 대해 많은 걸 가르쳐준다’는 코쟁이 시인의 말이 내게 하나의 미션으로 다가들어 있다는 느낌이 생생했다. 택시를 탔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이 밤에, 굉장히 급한 일인가 봐요?”
늙수그레한 운전기사가 물었다.
“예. 아버님이 위독하다고 연락이 와서요.”
나는 흐느끼는 시늉을 했다. 그리움이 깊다면 누구나 배우가 될 수 있었다. 노과장의 장례를 위해 명안진사에 온 꽁지머리가, 저녁을 먹으면서 과음해 김실장을 따라 502호실로 올라간 것은 8시쯤이었다. 노과장의 장례로 긴 하루를 보낸 패밀리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을 터였다. 택시는 화살처럼 달렸다. 한 시간이 조금 지나서 ‘제석궁’으로 갈라져 올라가는 비닐하우스 근처에 닿았다. 산협으로 뻗은 길은 눈이 얼어붙어 있었다.

“다 왔어요. 저 동네이거든요.”
나는 가까운 마을을 가리켰다.
“인명이 재천이라 했어요. 연세도 많이 드셨다니, 가시고자 하면 너무 붙잡지 마세요. 어른들, 다 쉬러 가시는 거예요. 나는 아버님 임종조차 보지 못한 불효자였는데…….”
“예예. 감사합니다.”
마을 쪽에서 개가 컹컹컹 짖었다.
산골이라 그런지 아직 봄이 멀어 보였다. 얼어붙은 눈을 날렵하게 밟으며 비닐하우스를 끼고 돌았다. 제석궁은 지척이었다. 건물 어귀에 켜놓은 외등이 오래된 건물 외양을 고즈넉하게 비추고 있었다. M자머리는 한참 전에 퇴근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고, 탁월한 즉물적 감각을 갖고 있었다. 현관은 밖에서 자물쇠를 채워놓았고, 창엔 창살이 쳐져 있었다. 괜히 잠긴 현관이나 창살을 잘못 건들어 죽어가는 노인들의 혼곤한 잠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숲으로 돌아가 울타리를 타넘으니 뒤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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