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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종교도 소중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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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호 18면

상담을 하다 보면 종교가 다르다고 자녀의 결혼을 반대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한 집안에서는 종교가 통일돼야 화합이 된다”는 논리다. ‘우상 숭배’라며 제사를 지내지 않는 며느리가 유교나 불교를 믿는 어른들과 충돌하기도 한다. ‘재수가 없다’며 십자가를 내던지거나 ‘우상 숭배’라고 불상과 사찰을 불태우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경직된 교조적 교리와 사적 감정에 휘둘릴 경우 종교는 이렇게 폭력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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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문제로 총칼이 난무하는 나라들과 달리 국내 종교 갈등은 덜한 편이다. 교파에 얽매이지 않는 선불교와, 다양한 종교를 우리 식으로 변환시키는 샤머니즘의 영향인지 모른다. 새로운 종교를 능동적으로 받아들인 것도 특별하다. 중국에서 수입한 서학 서적을 읽고 교회를 독자적으로 창립하기도 했다. 기독교가 산업화와 항일(抗日)운동에 기여한 면이 있기 때문인지 아시아 국가에서 한국만큼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나라도 없다. 중국·일본 불교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한국불교를 원효가 살았던 통일신라시대처럼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되도록 돌려놓는 것도 우리의 과제다. 다문화시대에 보다 차원 높은 종교문화를 발흥시키기 위해서는 비교종교학이나 종교사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도 필요할 것 같다.

막스 뮐러 이후 암스트롱(K. Armstrong), 페이글스(E. Pagles)까지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점을 지적하는 이가 많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 이미 알렉산드리아에는 인도의 테라바다 불교가 들어와 있었다. 산상설교 등 예수의 가르침은 부처의 가르침과 거의 일치한다. 원시 기독교시대 영지주의는 불교 교리를 차용하기도 했다. 2세기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트는 브라민과 붓다에 대해 언급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한때 믿었던 마니교 경전에는 스스로를 붓다라고 부르는 테레빈투스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도마복음서의 내용도 정토신앙과 유사하다. 예수의 제자인 도마가 자신들의 시조라 하는 인도의 기독교 집성촌도 있다.

이슬람교·유대교·기독교는 모두 아브라함의 하느님을 믿는다고 해서 통칭 ‘아브라함교’라고 할 정도로 서로 비슷하다. 코란과 성경의 등장인물들은 아담과 이브 이후 예수와 마리아까지 놀랄 정도로 정확하게 일치하고 교리와 상황도 유사하다. 물론 이슬람교도는 예수를 무함마드 이전에 유일신인 알라(야훼)를 증거한 예언자라고 이해하는 등 차이는 있다. 역사가들은 수메르, 바빌론, 이집트 신화, 조로아스터교, 자이나교, 미트라교가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준 영향을 지적한다. 인간의 원형적인 뿌리와 심리학적 경험이 비슷하기에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는 모든 고등 종교가 서로 유사한 것은 당연하다.

십자군전쟁 등 이슬람과 기독교의 반목이 있었으나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항상 원수로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팔레스타인분쟁 전만 해도 다수의 이슬람교도는 유대인을 이웃이라고 봤다. 종교가 반목을 일으키는 것은 교리 때문이 아니라 종교를 도구로 선동을 일삼아 사욕을 챙기는 세속적 지도자 때문이다. 이주민이 많아지면서 종교도 다양해지고 있다. 종교와 가치관의 차이를 존중해 주는 나라가 성숙하고 행복한 나라다. 타 종교, 타 문화에 대한 무지로 인한 차별과 편견은 증오와 파괴, 고립을 낳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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