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경영] 제 1화 멈추지 않는 자전거 54년 ⑩ 다국적 제약사와 특허 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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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9면

‘캡토프릴(카프릴)’ 발매 기념식 모습.

1980년대 들어와 약업계에 비상이 걸렸다. 소위 선진국형 특허제도라 불리는 물질특허제도가 한국에서도 본격 시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제도는 사실상 의약품 시장의 대외 개방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그동안 일부 외국 기술을 도입하여 의약품을 생산해 왔던 대부분의 국내 제약기업은 큰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여건 속에서도 보령제약은 70년대 말부터 새로운 물질을 찾아 산업화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물론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나의 유용한 신물질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약 1만 개의 후보 신물질을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어려운 과제이기에 보령제약은 다양한 연구를 계속하였고, 84년 세계적으로 그 효과가 입증된 고혈압 치료제 ‘캡토프릴’에 관한 세 가지 새로운 제조 공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한국은 물론 기술 선진국인 미국·일본·영국 등으로부터 모두 18건의 특허권을 취득했다.

그러나 특허권을 보유하는 일은 신물질을 개발하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86년 미국 스퀴브사가 한국 특허청에 즉각 이의를 제기했다. ‘신규성과 진보성이 결여되었고 실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캡토프릴(카프릴)’의 특허권을 놓고 미국 스퀴브사와 특허 분쟁을 승소로 이끈 김돈기 이사(오른쪽).



이후 스퀴브사는 이의신청이 처리되는 동안 특허기술에 대한 이론적 공방을 하기보다는 한국 정부의 각 부처에다 ‘보령제약의 특허를 인정하지 말라’고 정치적 압력을 가했다. 그 사이 보령제약은 보사부에 캡토프릴 생산을 위한 원료 허가 및 보호 지정을 신청했고, 보사부의 감독하에 제조 공정 및 실시에 대한 실사를 받아 그 기술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스퀴브 측의 악의적인 방해는 계속되었다. 스퀴브사는 88년 2월 ‘보령제약의 특허가 스퀴브의 특허를 침해하고 있다’며 서울 민사지방법원에 ‘특허권 침해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출했다. 한국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특허를 인정받은 사실을 무시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였다. 결국 다섯 차례의 변론을 거쳐 88년 6월 법원은 그들의 가처분 신청을 기각하고 보령제약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같은 한국 법정에서의 공방과는 별도로 특허를 둘러싼 분쟁은 한국과 미국 간의 통상 문제로까지 비화되었다. 스퀴브사는 88년 “미국 대통령이 한국 정부에 보복 조처를 취해줄 것”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통상대표부에 제출하였다. 미국 정부가 나서서 보령은 물론 한국 정부에 보복을 하라는 얘기였다.

이때 나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정부 고위 인사들로부터 협박 반, 회유 반의 권유를 자주 들었다. 미국이 기침을 하면 우리는 독감에 걸리던 시절 미국이 보복에 나설 경우 정부가 흔들릴 판이었고,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백기를 들란 얘기였다. “보령, 그거 뭐 하는 회산데 이렇게 시끄럽게 굴어?” 이런 소리도 공공연히 들었다. 하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지레 겁을 먹고 그렇게 백기를 들면 언제 선진 제약기술을 개발하고 언제 신약을 만들 것인가. 잘못한 게 없는데 미국 대통령인들 두려울 게 없었다.

 결국 90년 스퀴브사는 스스로 모든 청원을 취하했고 당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고 불리던 법적 공방에서 다윗이 승리했다.

10만 달러에 달하는 변호사비와 많은 시간을 들였지만 특허 분쟁을 통해 보령제약이 얻은 소득도 적지 않았다. 법원은 물론 미국과 한국의 통상 문제로까지 비화된 분쟁은 약업계는 물론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주요 언론에서는 ‘한국과 미국, 고혈압 치료제 특허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연일 이 문제를 대서특필했으며, 그것은 곧 한국의 기술력과 자존심이 되살아나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인식되었다. ‘보령이 뭐 하는 회사인지’ 전 국민이 다 알게 된 것이다.

 캡토프릴 분쟁이 마무리되면서 보령제약은 세계적인 의약품 기술 개발력을 갖춘 제약회사로 부상했다. 실제로 캡토프릴 하나만으로 국제적인 특허 14건을 보유하면서 보령제약은 국내 제약업계에서 국제 특허를 가장 많이 보유한 회사가 되었다.

김승호 보령제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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