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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대 컴퓨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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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보듯 기계와 인간의 대결은 인간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인간을 대표하는 전사 켄 제닝스의 자신감은 대단했다. 제닝스는 47년째 방송되고 있는 미국의 인기 퀴즈쇼 ‘제퍼디’에서 지난 2004년 74연승을 거두며 250만 달러의 상금을 따낸 ‘퀴즈의 신’이었다. 제닝스는 또 다른 인간 챔피언 브래드 루터와 함께 지난 17일 IBM의 수퍼컴퓨터 왓슨과 ‘제퍼디’ 무대에서 맞붙었다. 결과는 왓슨의 완승이었다.

 문제를 귀로 듣고 맞힌 것은 아니지만, 왓슨은 인간들과 같은 조건에서 텍스트 형태로 제시된 문제를 읽었고, 부저를 누르는 속도에서 인간을 압도했다. 왓슨의 승리가 충격적인 것은 ‘제퍼디’의 퀴즈 승부가 단순한 지식의 다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일상 언어(natural language)를 이해하고 답을 찾게 하는 것은 지금껏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난제였다. 체스나 바둑처럼 제한된 룰이 지배하는 보드 게임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컴퓨터가 퀴즈 도사들을 능가했다는 사실은 전문가들에게도 놀라운 일로 여겨지고 있다. 수퍼컴퓨터 전문기업 클루닉스의 권대석 대표(학창 시절 ‘장학퀴즈’ 기장원을 차지한 퀴즈 실력자이기도 하다)는 “국내라면 서울대와 KAIST가 연합해도 3년 이상 걸릴 연구 과제”라고 말했다.

 컴퓨터가 일상 언어를 이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일단 산업 면에서 큰 변화가 예상된다. 단순 응대가 필요한 직종부터 인간의 노동은 필요 없게 된다. 현재도 선진국 기업의 콜센터가 싼 인건비를 찾아 제3세계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이고 보면 결과는 명약관화하다.

 20세기 인공지능 연구자들의 꿈은 “위험하고 단순한 과업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 보다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게 한다”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냉엄하다. 결국 인간과 컴퓨터 사이에 분란이 일어난다면 영화 ‘터미네이터’보다는 19세기 초 영국의 섬유 노동자들이 방직기계를 불태웠던 러다이트 운동에 가까워질 가능성이 높다.

 위기에 놓인 것은 블루 칼라만이 아니다. IT계의 석학 니컬러스 카는 저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Shallows)』을 통해 구글의 검색 지식에만 의존하는 현대인의 지적 퇴보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등장한 왓슨의 쾌거(?)를 그냥 웃어 넘기기 힘든 이유다.

송원섭 JES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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