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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66) 고비는 넘겼으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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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52년 10월 강원도 철원군 김화읍 저격능선~삼각고지 사이의 고개에서 벌어진 전투 장면 모습이다. 중공군이 전차를 앞세우고 고지를 빼앗기 위해 진격하고 있다. 중공군은 휴전을 앞둔 53년 6월과 7월에 국군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중국 해방군화보사]


육군본부 작전 상황판에는 전황 보고가 도착하는 대로 아군과 적군의 대치 상태, 즉 ‘피아(彼我) 상황’을 알려주는 표지물이 부지런히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수를 제대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병력의 중공군 표지물들이 북쪽으로부터 남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의 아군 자리를 대체했다.

그치자 미 폭격기 하루 2143회 출격 … 중공군이 주춤했다

 중공군의 공세는 6월 14일 다시 한번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아군이 절박한 상황에 몰린 모습이 속출하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정리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의 『금성전투』에는 그런 여러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반격을 거듭하는 국군 전면에 압도적인 병력의 중공군이 계속 출현했다. 국군은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거의 절반 가까운 병력을 손실한 5사단의 3개 연대는 사기가 크게 떨어져 있었다. 책 속의 한 증언자는 “그때는 사기가 떨어져 (적군의) 따발총 소리만 나도 후방을 향해 무조건 퇴각했다”고 회고했다.

 5사단 전선에 배치했던 3개 연대가 급격히 무너지면서 후퇴를 거듭하자 사단 사령부는 이들의 철수를 엄호하는 한편, 공병대를 동원해 북한강에 놓인 임시 교량을 폭파하는 등 대책을 서둘렀다. 중공군을 피해 일부 병력은 장비 등을 포기하고 헤엄쳐 가까스로 강을 건넜다. 그 과정에서 대대장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도 발생했다.

 이튿날인 6월 15일에는 다행히 날씨가 갰다. 하늘을 가렸던 두터운 구름층이 사라지고, 비도 멈추면서 본격적인 미 공군의 공중 폭격 지원이 펼쳐졌다. 『금성전투』에 따르면 미 5공군과 미 해군 77 특별기동부대는 전 항공력을 동원해 중공군 폭격에 나섰다. 이날 유엔군 공군 비행기의 출격은 모두 2143회를 기록함으로써 6·25전쟁 개전 뒤 아군의 하루 출격 횟수로는 최고를 기록했다고 한다.

 후방으로 밀려와 다시 설정한 주 저항선에서 국군은 전선 배치를 일부 조정했다. 미 8군의 예비로 있었던 국군 3사단을 투입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병력 손실이 많고, 급속한 후퇴 때문에 장비마저 크게 상실했던 국군 5사단을 대체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래도 고비는 넘기고 있었다. 미 8군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국군 2군단도 새 저항선을 튼튼하게 설정함으로써 중공군은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가기 힘들었다. 5사단이 뒤로 밀리면서 동쪽으로 접한 미 10군단의 방어지역에도 공백이 생겨나 위험했다. 그러나 미 10군단장은 날씨가 개면서 동원할 수 있었던 미 공군력과 함께 군단의 모든 화력(火力)을 집중해 가까스로 국군 5사단과의 방어선을 연결했다.

 새로 형성된 전선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정도였다. 16일 저녁이 되면서 전선은 더 이상 요동치지 않았다. 미 공군기의 공습이 위력을 찾으면서 중공군의 공세가 한풀 꺾이고 만 것이다. 중공군의 포격은 공세를 시작한 직후인 11일에는 하루 6만 발을 기록해 중공군 참전 이래 최고치였다. 그러나 그 뒤로는 하루 평균 2만8000발, 18일에는 1만 발까지 떨어졌다.

 그만큼 중공군의 공세는 눈에 띄게 약해졌다. 중공군의 6월 공격은 이로써 끝을 맺었다. 6월 10일 시작해 18일까지 벌어진 이 공격으로 중공군은 금성 돌출부 동쪽의 국군 방어지역을 일부 빼앗는 데 성공했다.

 국군의 사상자는 모두 7300여 명, 중공군은 확인 사상자 6100명에 추정 사살 7200여 명을 합쳐 약 1만3000여 명의 병력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적의 기습에 따른 급속한 후퇴와 전선 붕괴로 아군은 장비 손실 면에서 피해가 컸다. 국군이 노획한 중공군의 무기는 기관총 48정을 비롯한 279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군은 기관총 161정을 포함한 6124점의 장비를 잃었다. 중공군 장비 손실의 22배에 달하는 수치였다.

 나는 육군본부에서 막바지까지 이 중공군 6월 공세를 지켜보고 있었으나, 17~18일에는 그에 전념할 수 없었다. 그때 바로 벌어졌던 것이 앞서 소개한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전격 석방’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를 깊은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과 그를 두고 벌어진 미군의 강력한 항의, 한국 육군참모총장으로서 내가 대응해야 할 방법 등을 처리하고 생각하느라 중공군의 공세에 신경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중공군의 1단계 공세는 그 시점이 마지막이었다.

 중국은 그러나 6월 공세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규모의 공세를 또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승만 대통령의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그 토대를 제공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대목이다. 앞에서도 회고했듯이, 중국 또한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지속적으로 이어갈 마음은 전혀 없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은 이 땅 위에서의 전쟁을 하루빨리 마감하려는 입장이었다.

 그런 중국의 입장에 당시 큰 타격을 준 사건이 이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었다. 이 대통령의 번개와 같았던 전격적인 포로 석방은 그때까지 힘겹게 이어온 아군과 공산군 측의 휴전회담 전 과정을 원점으로 돌릴 수도 있던 강력한 조치였다. 공산군 측이 쉽게 양보할 수 없었던, 아울러 자신의 수많은 병력이 아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결코 물러설 수 없었던 사안의 하나가 전후 포로 처리 문제였다.

 중국은 중공군 포로들이 석방돼 자신의 의지에 따라 제3국 또는 당시 ‘자유중국’으로 불렸던 대만으로 가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자유 의사에 따른 포로 석방 문제를 가장 민감하게 여겼고, 급기야 대한민국 대통령이 그런 반공 포로를 독단적으로 석방해버리자 경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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