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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1128일의 기억] 중공군과의 대회전 (265) 힘겨운 반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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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6·25전쟁 대부분의 과정에서 국군과 유엔군이 맞서야 했던 적은 중공군이다. 아군은 모든 전선에서 중공군과 격렬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사진은 1952년 백마고지 전투에서 중공군과 싸우다 후송당한 국군 병사들의 모습이다. 중공군은 53년 6~7월 막바지 대규모 공세로 다시 국군을 공격해 왔다. [미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전투에서는 일방적으로 상대를 때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압도적인 전력(戰力)의 우위에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아군이 상대를 때리기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싸움은 늘 상대에게 얻어맞는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휴전 직전의 장마, 전선은 비에 젖어 #구름 탓에 미군 공중지원도 끊겼다 #13㎞ 방어선 한 점만 때린 중공군 #전선 돌파해 국군 등 뒤에서 덮쳤다

 적이 치고 들어올 때, 전선(戰線)에서 그런 적의 공세를 맞아 물러날 때 그 군대가 지닌 실력의 한 면모는 반드시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러설 때 잘 물러서는 방법은 말처럼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더구나 사느냐 죽느냐를 두고 싸움이 벌어지는 참혹한 전장(戰場)에서 적에게 일단 밀리면 쉽게 무너져 처절한 패배를 맛보기 십상이다.

 훈련이 충분하고, 더구나 싸움의 모든 상황을 미리 설정해 그에 대비하는 방법을 강구한 부대는 그렇게 몰리는 상황에서도 제 대오(隊伍)를 유지하면서 차분하게 적에게 대응할 수 있다. 밀릴 때 밀리더라도 반격(反擊)할 수 있는 여력을 유지해 적의 공세를 꺾을 수 있는 것이다.

 당시 금성 돌출부 오른쪽을 맡고 있던 8사단과 5사단은 13㎞의 전선 정면에서 초반부터 적에게 밀려 내려왔지만 아주 비관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1951년의 강원도 현리 전투에서 전선으로부터 한 번 밀렸다가 급기야 3군단 전체가 처절하게 붕괴됐던 때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밀리면서도 제 편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면서 적의 공세에 맞서는 능력이 이미 국군에 갖춰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점을 유심히 살폈다. 국군은 50년 10월 이 땅 위의 전쟁에 뛰어든 막대한 병력의 중공군에 마구 밀려 군대 전체가 부서지고 흩어지는 허약한 군대가 더 이상 아니었다. 금성 돌출부 오른쪽에서 중공군이 벌인 53년 6월 공세에 맞서고 있던 국군은 이미 그런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돌출부 전면의 6사단과 8사단·5사단을 지휘했던 2군단은 예비 3사단을 동원해 저지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고, 뒤이어 펼쳐진 미군과 유엔군의 공중 폭격 지원 등을 받으면서 중공군의 공세에 맞섰다.

 그러나 최전방의 동굴진지 등 강력한 참호를 쉽게 내줬다는 점, 일단 밀린 뒤 다음의 저지선을 강력하게 지키지 못했다는 점 등은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중공군의 공세가 끝날 때까지 세로 축선인 종심(縱深)에서 4㎞의 거리를 밀린다는 것 또한 심각하게 따져볼 일이기도 했다. 최전방의 전선이 무너질 것에 대비해 지휘관은 그 후방에 세밀하면서도 견고한 저지선을 설정하는 게 당연했다.

 1차 6월 공세에서 최종적으로 4㎞를 밀렸다는 것은 그런 저지선이 충분히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현리 전투 때의 국군은 아니었지만, 역시 전선을 돌파 당했을 때의 상황에 대비하는 능력은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국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주저항선을 한 차례 뒤로 옮겼다. 새 주저항선을 토대로 국군 8사단과 5사단은 활발하게 반격에 나서고 있었다. 그러나 한 차례 뺏긴 고지를 향해 다시 공격을 펼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당시는 마침 우기(雨期)이기도 했다. 6월과 7월이면 한반도를 찾아오는 그런 비 내리는 계절은 아군의 반격에 아주 불리했다. 미군의 강력한 공중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늘에 아주 낮게 깔린 두터운 구름층이 문제였다. 미군 폭격기와 전투기들은 그런 두터운 구름 때문에 비행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비도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국군은 고지를 향해 계속 공격을 감행했다. 수류탄을 던지면서 중공군이 뺏은 고지 참호 속으로 뛰어드는 육탄전도 펼쳤다. 아군의 희생은 계속 눈덩이처럼 커져가고 있었다.

 돈좌(頓挫)라는 용어가 있다. 공세를 펼쳐가다가 그 기세가 갑자기 뚝 끊기는 경우다. 보통은 예정한 목표에 다가서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행위를 중단하는 경우를 말하기도 한다. 국군은 중공군에 내줬던 고지를 되찾기 위해 나름대로 처절한 반격을 펼쳤지만 이런 돈좌의 상태에서 다시 물러나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선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를 통해 중국 측이 새로운 사단을 이 전선에 투입했다는 정황이 잡혔다. 중공군은 원래 금성 돌출부에 포진했던 6개 사단 병력 외에 새로운 사단을 후방에 준비해 뒀다가 전황이 불리해지면 바로 이들을 전선으로 옮겨 싸움에 나서도록 했던 것이다. 아군보다 훨씬 충분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중공군은 집요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수의 병력을 동원해 아군 1개 대대 전면에 중공군 5개 대대가 공격을 벌이는 경우도 있었다.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을 한 점에 집중해 선을 뚫은 뒤 후방으로 우회해 아군을 고립시키는, 전쟁 참전 이래 줄곧 그들이 구사했던 전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낮에는 미동도 하지 않다가 해가 지는 일몰 시점에 개미떼처럼 몰려오는 중공군은 반격과 역습에 병력을 상당 부분 상실해야 했던 당시의 일선 국군에는 공포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날이 어두워지면 벌어지곤 했던 공방(攻防)에서 국군은 초반에 우세를 보였다. 적잖은 전투를 겪으면서 다져진 국군의 전의(戰意) 또한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늘 문제였다. 끊임없이 투입돼 전선으로 다가서는 중공군의 수적인 우세 앞에서는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해가 진 일몰 뒤에 시작되는 중공군의 공세는 국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주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보통 밤 9시를 넘기면서 중공군은 점차 우위를 차지했다. 모두 중공군의 수적인 우세에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국군의 저지선은 그렇게 고지를 뺏긴 뒤 점차 후방으로 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길고 긴 방어선의 한 점이 뚫린 뒤 그곳을 통해 물밀 듯이 쏟아져 내려오는 중공군에 의해 고립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심리적인 위기감도 그에 큰 몫을 했다. 국군은 적을 맞아 몸을 바로 세우고 맞서 싸우면서도 그렇게 밀려 내려갔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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