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권력이 가까워선 안 되는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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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뉴욕타임스紙 기자로 40∼70년대 워싱턴 무대를 누비다 지난 95년 86세를 일기로 작고한 제임스 (스코티)
레스턴은 기자의 한 전형을 보여준 사람이다. 언론계의 나이든 세대에게 그는 역할 모델이었지만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정부에 대한 미국 언론의 태도가 공격적이 되면서 그를 제도권의 홍보 도구로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도 그런 비난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80년 동료기자 톰 위커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백악관 2층(대통령 주거공간)
을 출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대통령이 원하면 아무리 쓰레기 같은 이야기라도 보도할 것’이기 때문이라는 소리는 사실과 다르다… 내 칼럼을 거물급 인사와의 인터뷰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사적인 관계가 작용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다수 워싱턴 기자들처럼 그도 때로는 친분을 가장했다. 75년 3월 레스턴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간의 통화 기록이 보여주듯 키신저는 그에게 간청하다시피 했다. “이젠 친구로서 말하겠네만 그들(이스라엘인들)
은 무모할 정도로 제멋대로 나오고 있어.” 키신저는 이어 이렇게 말했다. “스코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어?… 만일 자네가 국무장관이나 대통령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나?” 그러자 레스턴은 “난 모르겠어”라거나 “그건 악몽같은 얘기군”하는 식으로 슬쩍 비켜나간다. 그러자 키신저는 “그러면 수요일이나 목요일쯤 한 잔 하지. 하지만 통화 내용은… 내가 그랬다고는 쓰지 말게나.”

이번주 일리노이大가 공개하는 레스턴의 개인 문건들은 그같은 일화들로 가득하다. 키신저가 미국의 對쿠바 관계정상화 대가로 제시하는 조건들을 레스턴에게 밝힌 내용도 일기장에 나타난다.
레스턴은 “키신저는 내게 카스트로를 만나면 그 조건들을 전해줄 권한을 부여했다”고 썼다. 레스턴의 개인 서신과 일기는 또 상대의 노골적인 회유를 뿌리치는 한편 정부 기밀을 언제 기사화할 것이냐는 난제와 씨름한 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그의 최대 실수는 피그灣 침공사건 때였다. 뉴욕 타임스는 61년 4월 美 중앙정보국(CIA)
이 쿠바 망명자들을 동원해 쿠바를 침공하려 한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기사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공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케네디 대통령조차 타임스가 목청껏 경각심을 발하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 애국자였던 레스턴은 냉전기간 중 언론인의 사명과 애국심 사이에서 고뇌했다. 53년 편집인이었던 터너 카틀리지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훌륭한 기자와 훌륭한 시민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기가 항상 쉽지만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정보는 보도하지 않아야 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쿠바에 핵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국이 봉쇄 계획을 세웠다는 대특종을 낚고도 즉각적인 보도를 보류한 레스턴의 판단이 옳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의 요청으로 대통령의 발표가 있기까지 48시간 동안 기사를 보류했다. 또 레스턴은 50년대 자신의 칼럼을 통해 역공작을 꾸미려는 CIA의 기도에 맞섰다. 마찬가지로 그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64년 자신을 백악관 집무실로 불러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배리 골드워터 상원의원을 비열하게 공격했을 때도 스캔들과 센세이션의 전달 통로로 이용되기를 거부했다. 바로 그해 레스턴은 케네디 암살사건에 대한 갖가지 음모설을 지면을 통해 파헤쳐 보라는 권유를 거부하며 친구에게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것은 저널리즘의 문제라기 보다는 매너의 문제다.”

그의 일기장에는 47년 어느날 저녁 로버트 태프트 공화당 상원 원내총무가 그의 집을 방문했던 날을 기록하면서 언론인이 ‘풍자만화가’로 전락했다고 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태프트는 흔히 ‘답답하고 재미 없는 계산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다정하고 허심탄회하며 매우 쾌활한 인물’이란 것을 알게 된 후 기술한 내용이다. 기자의 도덕성은 ‘인물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하고, 모든 선입견을 철저히 검증하며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 것’이라고 레스턴은 쓰고 있다. 요즘에도 여전히 훌륭한 충고다.

Evan Thomas,
Lucy Shackelford 기자

뉴스위크한국판(http://nwk.joongang.co.kr) 제 404호 199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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