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때 스키 탄 ‘스키장 식당’ 아들, 아시아 정상에 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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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타나-알마티 겨울아시안게임 스키 남자 수퍼복합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정동현이 날렵한 자세로 기문을 통과하고 있다. [알마티=연합뉴스]

강원도 고성의 스키장을 안마당처럼 휩쓸고 다니던 천둥벌거숭이가 한국 스키의 선봉장으로 우뚝 섰다. 2011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알마티 겨울아시안게임 스키 남자 수퍼복합에서 금메달을 따낸 정동현(23·한국체대)이다.

지난달 31일 알파인스키 활강에서 동메달을 따 한국팀에 첫 메달을 안긴 정동현은 4일 알파인스키 수퍼복합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1999년 강원 대회의 허승욱 이후 한국 알파인스키가 12년 만에 아시안게임에서 따낸 금메달이었다.

강원도 산골에서 태어난 정동현은 세 살 때부터 스키를 탔다. 채환국 대한빙상연맹 부회장은 “강원도 고성의 알프스 스키장에 가면 꼭 들르는 식당이 있었다. 김치 맛이 기가 막혀 아는 사람들은 스키를 타고 난 뒤 꼭 그 집을 찾곤 했다. 그 추위에 아랫도리를 홀딱 벗은 꼬마가 식당 근처를 뛰어다니곤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정동현이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채 부회장은 “스키장 근처에서 나고 자라 걸음마 시작하자마자 스키를 탄 정동현은 타고난 스키 선수”라고 말했다.

“스키 타면서 겁먹은 적 한 번도 없어”
정동현은 “세 살 때 어린이용 스키를 타고 아버지한테서 기술을 배웠다. 네 살 때 알프스 스키장 상급자 코스를 탔던 걸로 기억한다”며 “워낙 스키를 좋아하고 어릴 적부터 탔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겁먹는 법이 없다”고 말했다.

정동현은 전교생이 스키 선수인 고성 광산초 흘리분교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선수 활동을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5, 6학년 형들보다 월등한 기량으로 소년체전에서 금메달을 3개나 따내며 ‘스키 신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일찍 두각을 나타냈다고 해서 순탄한 선수 생활이 이어진 건 아니다. 2005년 개인훈련을 하겠다며 국가대표 소집을 거부하는 바람에 2년간 대표에 뽑히지 못했다. 그 바람에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에도 나가지 못했다. 지난해 밴쿠버 겨울올림픽에서는 대회 직전 오른쪽 허벅지가 찢어지는 중상을 입어 코스를 제대로 완주하지 못했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도 위기는 있었다. 대회 조직위원회가 카자흐스탄의 첫 종합우승을 위해 정동현의 주 종목인 회전과 대회전을 제외하는 홈 텃세를 부린 것이다. 그래도 그는 힘을 냈다. 대회를 앞두고는 김종욱 한국체대 총장 겸 선수단장에게 “금메달 2개는 따오겠습니다”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운도 따랐다. 1일 수퍼대회전 경기 도중 넘어져 발목 인대를 다쳤다. 걷기도 힘들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지만 수퍼복합 경기가 악천후로 하루 연기되는 바람에 필사적인 물리치료로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정동현은 “대회를 앞두고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메달을 따지 못한 수퍼대회전 종목에 약간 아쉬움이 남는데, 그때는 너무 자신감이 넘쳐 코스를 이탈했다. 그래서 수퍼복합에서는 편안하게 경기에 임했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했다.

정동현이 그간 크고 작은 대회에서 따낸 금메달은 42개에 이른다. 그래도 젊은 그는 훨씬 더 큰 꿈이 있다. 그는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땄으니 이제는 2014년 소치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싶다. 주 종목인 회전의 세계랭킹이 80위권인데 열심히 훈련하면 15위권까지 올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목표를 말했다.

결승선 통과 직후 쓰러진 이채원

여자 스키 활강과 수퍼대회전에서 금메달을 따 2관왕에 오른 김선주 선수. [알마티=뉴시스]

남자 스키에 정동현이 있다면 여자는 김선주(26·경기도체육회)와 이채원(30·하이원)이 있다. 김선주는 대회 첫날 활강에서 한국팀에 첫 금메달을 안기더니 다음날 수퍼대회전에서는 유력한 우승후보였던 페도토바 뤼드밀라(카자흐스탄)를 0.5초 차로 제치고 2관왕에 올랐다. 4일 수퍼복합에서는 결승선 바로 앞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안타깝게 3관왕을 놓쳤다.

김선주는 “마지막까지 1등으로 달리고 있었는데, 눈이 쌓여 있던 곳에 스키가 걸리면서 튕겨나갔다. 두세 번만 더 턴을 하면 우승이었기에 많이 아쉽다”고 속울음을 삼켰다. 8년간 대표 생활을 하며 끊임없이 부상과 재기를 반복해온 터라 금메달 2개로도 성이 차지 않는 듯했다. 김선주는 소치 겨울올림픽 출전에도 욕심을 냈다. 그는 “국내 여자 알파인에서 올림픽에 2회 출전한 선수가 없다고 들었다. 내가 그 역사를 한번 만들어 보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2일 크로스컨트리 여자 10㎞ 프리스타일에서 금메달을 딴 이채원도 화제다. 한국 크로스컨트리가 겨울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국체전에서 45개의 금메달을 따낸 이채원은 국내에서는 독보적이지만 국제대회 성적은 초라했다. 명랑한 성격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언젠가는 한번 정상에 오르겠다”며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어느덧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체력은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았고 노련미가 몸에 뱄다. 온몸의 진액을 짜내는 역주를 펼친 이채원은 결승선을 통과한 뒤 쓰러져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열심히 하면 그 대가가 반드시 있다는 본을 보여줘 기쁘다. 후배들에게 큰 선물을 준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5일 현재 금메달 12개로 종합 2위를 달리고 있다. 종전 최고 성적은 1999년 홈(강원)에서 따낸 금 11, 은 10, 동 14개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국 선수단이 목표로 내건 게 ‘금메달 11개로 종합 3위 수성’이니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이번 대회 선전을 이끄는 건 ‘전통의 효자 종목’ 빙상이다. 하지만 괄목할 만한 성과는 스키 종목에서 나왔다. 대회 전 대한체육회가 스키에서 꼽은 예상 금메달은 2개. 알파인과 스키점프에서 1개씩을 바라봤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나마도 가능할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회가 시작되자 한국 스키는 무려 4개의 금메달을 따내며 보란 듯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다.

이처럼 스키가 약진할 수 있었던 것은 문화체육관광부의 도움이 큰 힘이 됐다. 밴쿠버 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의 선전에 고무된 문화부는 지난해 ‘설상(雪上) 종목 특별육성 지원사업’을 펼쳤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스키장의 전용 코스를 임대해 마음껏 훈련할 수 있도록 했고, 스키 리조트에 체력단련실·물리치료실·전용식당 등 태릉선수촌과 똑같은 시스템을 운영하도록 지원했다. 이기홍 감독을 중심으로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충실히 소화한 것도 스키에서 금메달이 쏟아진 원동력이었다.

아스타나=온누리 기자 nuri3@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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