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님은 소설 써야 겄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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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호 10면

초여름 오후 국어시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던 까까머리 중학생들을 깨울 요량으로 ‘예를 들면 선생님’이 예를 드셨다.
“산문은 연상과 인과의 세계지만, 시는 단절과 비약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여름’에 대한 글을 쓴다고 할 때 여름에서 연상되는 낱말들을 쭉 써본다. 그렇게 나온 낱말들로 글을 쓰는 것이 산문이라면, 그 낱말들을 다 빼고 여름에 대해 쓰는 글이 시라고 할 수 있지. 예를 들면 소설가 김동리 선생이 원래는 시를 썼어. 그런데 어떻게 해서 소설을 쓰게 되었느냐 하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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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리는 시인 서정주와 문학을 두고 교유하는 사이였으며,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평을 구하곤 했다. 어느 날 동리가 시를 한 편 써서 미당을 찾아갔다.
“아우님, 나 시 한 편 썼네.” “그라요? 어디 한번 보소.” “적어오진 않았네. 고마 읊어보겠소.” “싸게 읊어보시오.”
미당은 눈을 지긋이 감았고 동리는 헛기침으로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시를 읊었다.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첫 소절을 듣자마자 미당은 무릎을 쳤다.
“됐네. 그마 허시오.” “어째 영 파인가?” “아녀, 좋아.” “우째 한 소절 듣고 좋은 줄 아는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같은데.”
“아따, 시인의 직관이고 통찰인 게지. 바닷물 짜다는 거 알려고 바다를 통째로 다 마실 필요는 없잖소. 미욱한 성님하고는. 한 모금이면 알제. 한 모금이면.”
미당은 다시 눈을 감는다.

“좋다, 좋아.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씨.”
연방 감탄하는 미당을 보던 동리, 갑자기 마려운 표정을 짓는다.
“아우님, 잘못 들었는 거 같네. ‘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인데 말이야.”
‘꼬집히면’이란 말에 눈을 번쩍 뜬 미당이 슬픈 눈으로 동리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성님, 아무래도 소설을 써야 쓰겄소.”

그 일이 있은 후 동리는 시를 접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선생님’의 이야기가 하도 썰렁했던지라, 아이들은 전부 몸서리를 쳤고 몰려오던 잠은 싹 달아났다. 그때 달아난 잠 때문에 나를 비롯해 당시 우리 반 아이들은 아직도 다들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

5년 전인가 이시영 시인은 이 이야기로 ‘젊은 동리’란 시를 썼다. 시의 전문은 이렇다.
술이 거나해지자 젊은 동리가 젊은 미당 앞에서 어젯밤에 잠 아니 와서 지었다는 자작시 한 수를 낭송했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 미당이 들고 있던 술잔을 탁 내려놓으면서 무릎을 치고 탄복해 마지 않았다. “벙어리도 꽃이 피면 우는 것을…”이라. “내 이제야말로 자네를 시인으로 인정컸네.” 그러자 동리가 그 대춧빛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대꾸했다. “아이다 이 사람아. 벙어리도 꼬집히면 우는 것을…”이다. 미당이 나머지 한 손으로 술상을 꽝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됐네 이 사람아!”

역시 시인은 다르다. 같은 내용을 누구는 싱거운 산문으로 늘어놓는데, 시인은 ‘술상을 꽝 내리치는’ 한 편의 시로 뽑아내니 말이다. 게다가 그 누구는 술상을 내리친 미당의 손이 아프지 않았을까, 5년 전부터 줄곧 걱정하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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