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태극 유니폼 행복했습니다, 맨유 유니폼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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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박’이 태극 유니폼을 벗었다. 이제 ‘센트럴 파크’만 남았다.

 축구대표팀 주장 박지성(30·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은 3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5층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오늘로 대표팀에서 은퇴했음을 밝힌다. 국가를 대표해 축구 선수로 살아온 건 무한한 영광이며 자랑이었다”고 말했다. 축구팬들은 이제 맨유의 유니폼을 입은 박지성만 볼 수 있다. 그는 잉글랜드 무대에서 ‘센트럴 파크’로 통한다.

박지성이 31일 신문로 축구회관에서 축구대표팀 은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박지성은 “아직 이른 나이라고 생각하지만 한국 축구와 나를 위해서는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성장할 수 있었듯이 후배들에게 좋은 기회를 줘야 한다”고 은퇴 이유를 설명했다. 또 “부상(무릎)이 없었다면 체력적으로 힘들어도 대표선수 생활을 이어갔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은퇴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박지성은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 시절이었던 2003년 3월과 맨유에서 뛰던 2007년 4월 등 두 차례 수술받은 오른 무릎에 자주 물이 차올라 소속팀과 대표팀 생활을 병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박지성은 자신의 뒤를 이을 선수로 김보경(22·세레소 오사카)과 손흥민(19·함부르크)을 꼽았다. 앞으로 맨유에 전념하며 3~4년 정도 더 현역으로 뛸 생각이다. 그는 “비록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을 떠나지만 한국 축구에 보탬이 되는 새로운 도전을 하겠다”고 각오를 말했다.

 10년9개월에 걸친 헌신이었다. 박지성은 명지대 2학년이던 2000년 4월 5일 지금은 사라진 동대문운동장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했다. 라오스와의 아시안컵 지역예선이었다. 다치지 않는 한 국가의 부름을 거절한 적이 없는 그는 지난달 25일 일본과의 아시안컵 준결승전에 출전함으로써 ‘센추리클럽(국가대항전 100경기 출전)’에 가입했다. 박지성이 뛴 100경기는 한국 축구의 역사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 눈부시게 활약해 한국 축구의 첫 황금시대를 열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퍼뜨린 도전과 성취의 패러다임을 가장 정확히 받아들여 실천했다. 그럼으로써 성공을 이룩하고 우리 스포츠 문화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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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달리기가 느리고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해도 축구장 안에서 누가 더 잘할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외쳤다. 실패에 대한 공포도 이겨냈다. 2001년 6월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에, 2001년 8월 평가전에서 체코에 0-5로 져 ‘오대영’이라는 별명을 얻은 히딩크가 ‘최후의 승리’를 믿었듯 박지성도 시련의 가치를 믿었다.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잉글랜드 맨유로 이적하자 ‘마케팅용’이라는 비아냥이 나왔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헌신적이었고, 큰 승부에 강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고의 명문 팀에서 의문의 여지 없는 주전 선수가 되었다.

 명성과 부를 동시에 거머쥐었지만 겸손했고, 스캔들도 없다. 기껏 출처를 알 수 없는 ‘미스코리아와 결혼설’ 정도다.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많은 경기에 출전할 수 있는 것은 자기절제와 관리 때문이다. 그는 “왜 골을 못 넣느냐는 비판에는 수십 가지 이유를 들어 반박할 수 있지만 왜 꾸준하지 못하느냐는 비판은 아프다”는 말을 즐겨 해왔다. 박지성은 불멸의 차범근과 함께 우리 축구의 위대한 유산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박주영(모나코)·기성용(셀틱)·이청용(볼턴) 등의 롤 모델이다.

글=최원창 기자
사진=임현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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