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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마음의 노숙을 끝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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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진홍
논설위원

# 연일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가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있다. 이럴 때 과연 노숙인들은 어떻게 견딜까? 며칠 전 자정이 임박한 시간에 서울 남대문 근처 지하보도로 들어서자 10여 명의 노숙인들이 잠을 청하고 있었다. 바깥처럼 살을 에는 듯한 바람은 누그러져 있었지만 녹록지 않은 한기(寒氣)가 여전한데도 몇몇은 그나마 슬리핑백 안에 몸을 누인 채 코를 골며 잠이 들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대개는 골판지와 스티로폼으로 바닥의 한기와 찬바람만 간신히 막은 채 겹겹이 껴입은 옷과 때에 전 파커모자에 몸과 얼굴을 파묻고선 애써 잠을 자려 뒤척이고 있었다. 아무리 지하보도 안이라고 해도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피할 도리는 없었으리라.

 # 추위를 견디다 못해 몇몇 노숙인들은 아예 스스로 범죄를 저지른 후 제 발로 경찰서 유치장 행을 자원해 며칠간 구류라도 살고 나오려 했다. 그들 나름의 극단적인 ‘피한(避寒)법’인 셈이다. 하지만 대개는 의도했던 대로 유치장에서 구류를 살기보단 불구속 입건처리만 돼 다시 거리로 내쳐지기 일쑤다. 일선 경찰도 그들이 어떤 의도로 일을 저질렀는지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경찰서 유치장이 노숙인들 한파 피난처는 아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임의로 구류살기의 혜택(?)을 줄 수도 없는 실정이다. 이래저래 노숙인들에겐 이 한겨울 나기가 이렇게 쉽지 않다.

 # 햇살이 비치는 낮일지라도 추위가 누그러지지 않는 요즘, 버젓한 직장이 있는 이들은 찬바람 맞으며 바깥에 나가기조차 싫어 점심식사를 회사 내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적잖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칼바람을 맞으면서라도 무료급식소를 찾아갈 수밖에 없다. 그나마 요즘은 예전처럼 길게 줄 세워 밥을 타기보다는 바람 피할 간이천막이라도 쳐놓고 그 안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자원봉사자들이 뜨끈한 국밥을 날라다 주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특히 서울역·용산역 등 큰 역 주변에는 으레 무료급식소가 거의 매일 가동되고 있다. 더구나 무료급식소의 간이천막이 컨테이너로, 다시 아예 건물로 진화해간 곳들도 적잖다. 그래서 혹자는 그렇게 매일 무료급식을 해주니 노숙인들이 자활할 생각은 않고 역 주변에서 기식하는 것 아니냐고 날을 세워 되묻기도 한다.

 # 그러나 이런 무료급식소마저 없다면 노숙인들은 당장 생존이 불가능하다. 일단은 거둬 먹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노숙인들에게 밥 퍼주는 것이 되려 그들의 타성을 기르는 것이 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인지는 몰라도 서울 전농동에서 시작돼 전국적으로 손길이 뻗은 무료급식봉사단체인 ‘밥퍼나눔공동체’ 같은 곳은 적어도 부산에선 매주 화·금요일은 부산진역, 목요일은 해운대, 토요일은 시청녹음광장 같은 식으로 장소를 옮겨 가며 무료급식을 한다. 하지만 노숙인들은 용케 그곳들을 요일마다 찾아다니며 끼니를 해결한다. 어찌 보면 그들도 살려고 발버둥치는 셈이다.

 # 솔직히 거리의 노숙인들만 걱정할 일은 아니다. 멀쩡하게 차려 입고 따끈한 방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마음이 노숙인’인 사람들이 적잖기 때문이다. 냉랭하다 못해 원수가 따로 없는 겉만 멀쩡한 부부들, 서로 의가 상해서 아예 의절하고 사는 형제들, 늙고 냄새 나는 부모가 싫다며 이리저리 피하고 떠넘기고 외면하며 살아가는 철없는 자식들…. 어디 그뿐이랴. 직장에서 자의반 타의반 나온 후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치킨집, 빵가게 하다 그나마 있던 것마저 거덜내고 스스로 자기 안에 숨어버린 채 컴퓨터 자판을 친구 삼아 방 속에 ‘콕’ 갇혀버린 한국판 ‘히키코모리’들! 이들 모두가 마음의 노숙인들이다.

 # 설이 다가온다. 마음의 노숙인들에게 이런 명절이 즐거울 리 없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마음의 노숙을 끝장내자. 너절하게 때가 탄 마음의 골판지와 스티로폼을 버려버리고 냄새 나는 이불 같은 미련과 원망일랑 떨쳐 버린 채 공짜밥의 유혹도 끊듯 이젠 진짜 끝내야 한다. 마음의 노숙을!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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